다섯 살 된 딸 아이는 어린이집 같은 반에 싫어하는 여자애가 있다. 처음엔 “어린 아이들이 설마 뭘…”이라며 무시하고 지나갔는데 딸 아이는 진지했다. 그냥 안 맞는 거였다.
보아하니 딸 아이가 자기 내키는 대로 행동하길 좋아하고 혼자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는 스타일이라면, 그 아이는 나서길 좋아하는 활달한 골목대장 스타일이었다. 어리다 하더라도 아이들에게도 각자의 개성이 있고 호불호가 있었다.
난 아마도 억지로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고 가르치진 않을 것 같다. 시도도 안 해보고 거부하는 것은 구슬려 볼 필요가 있지만 익히 경험하고 나서 ‘안 맞는다’ 싶은 걸 어쩔 도리는 없다. 어른이 되면 어차피 싫어도 잘 맞는 척을 해야될 때가 허다한데 뭘 미리부터 위선을 연습할 필요는 없다.
인간관계에선 애써 노력하지 않는 게 늘 최선이라 생각해 왔다. 억지로 노력하는 순간 무리와 스트레스가 발생하고 그렇게 되면 타인과의 인간관계 이전에 ‘나 자신과의 관계’가 어그러지기 시작하니까.
그럼 우리는 그 어디에도 도달을 수가 없다. 대신 ‘싫은 건 싫다’ 할 때의 기본 원칙이 있음을 주지시킬 필요는 있었다. 싫다고 해서 상대를 물리적으로 못살게 굴어서는 안 되고, 상대도 나를 싫어할 수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어느 우연한 기회에 사이가 좋아질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은 늘 열어놔야만 한다. 그리고 이때만큼은 내가 먼저 웃으며 손을 뻗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우리 다 같이 사이 좋게 지내야지’라며 나 역시도 애써 미소 지으며 딸에게 타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힘겨운 인간관계, 무리한 우정을 십 수년 동안 억지 노력해서 유지해 온 뒤 상처 어린 분노만이 남아 나중에 터져버리는 여자들을 너무 많이 듣고 봐서일지도 모르겠다.
주변 사람들을 만족시키려고 무리해서 힘든 관계를 유지하려는 습성이 한국 여자 특유의, 그것도 지극히 ‘모범적이고 착한’ 여자들의 조화로움에 대한 강박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