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교육은 서양 철학 하나를 가르쳐도 철학자의 이름과 그 핵심 주장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도록 한다.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그와 반대로 생각을 가로막는다. 그건 인간을 사유하는 존재가 아니라 정보를 입력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이다. 이건 철학에 대한 배반이다.
이런 풍토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철학적 사고를 하는 것은 철학자 또는 이를 전문으로 공부하는 지식인에게나 속한 특정소수의 일이라고들 여긴다. 나머지는 이들의 뒤나 따라가면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철학이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매우 일상적인 두뇌활동이다.
가령 우린 거의 매일 다음과 같은 질문들과 마주한다. 어떻게 해야 속지 않고 똑바로 판단내릴 수 있을까? 경험이 다르면 결론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인가? 나보다 권위를 가진 사람이나 기관의 판단이라면 내 생각은 그보다는 못한 것인가? 다수의 판단이 나보다는 아무래도 옳은가?
근대 철학의 출발점에 서 있는 데카르트와 관련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한 말은 알지만 그게 도대체 어떤 충격을 준 선언인지 그 맥락에 대한 교육은 없다. 그의 주장은 17세기 프랑스의 정신을 한 손에 쥐고 있던 카톨릭 교회가 “생각은 우리가 하는 것이고 너는 그걸 따르기만 하면 되”라는 독선적인 권위에 용기 있게 도전한 결과다. 이걸 안다면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의 혁명적 의미”를 주시하게 된다.
칸트의 철학이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경우도 별반 없다. 칸트는 데카르트보다 한 발 더 나가 그 생각하는 주체의 내면에 있는 원천적인 사유의 능력을 입증해나갔다. 선험적 판단능력이라고 하는 “아 프리오리(a priori)”는 뭔가를 경험하기 이전에 이미 내 안에 존재하는 주체적인 판단의 진지다.
그러기에 이런 능력을 타고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인간은 어떤 경험이라도 그 자신의 내면에서 스스로 해석하고 결론을 내리는 존엄한 존재다. 정부나 언론이나 교육기관이나 그 밖에 어떤 다른 제도적 권위도 이 인간 내면의 주체적인 사유능력을 멸시하거나 짓밟는다면, 그건 타고난 인간의 철학적 권리와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철학적 확신과 생각이 그 사회의 상식이 되는 사회는 다수를 앞세우는 기만과 힘으로 내리누르는 억지가 통하지 않게 된다.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