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이다. 한 소녀가 새로운 시대의 이상을 잡아보려 애쓰지만 봉건적인 아버지의 엄명으로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 잠시 저항해보나 역부족이다. 다행스럽게도 상대는 결혼식 날 처음 본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불안했던 마음에 이내 웃음꽃이 핀다. 그녀에게 세 딸이 태어난다. 막내가 낳은 두 딸의 인생이 또한 이어져간다. 3대에 걸친 거의 100년의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여자들의 이야기.
이제 서른이 갓 넘은 고이즈미 노리히로 감독의 영화 ‘플라워즈’는 일본 최고의 여배우 여섯 명을 출연시켜 과거와 오늘의 여자들이 겪는 아픔과 기쁨을 매혹적인 일본의 풍광을 배경으로 엮어낸다. 세 딸 가운데 첫째는 도쿄에서 대학을 나온 후 교수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다가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 둘째는 아직 남녀차별이 여전했던 60년대 일본 직장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지켜내려는 중에 남자의 프로포즈를 받고 일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한다. 막내는 첫째를 낳다 죽을 고비를 겪고 둘째를 분만하다가 결국 목숨을 잃는다.
그렇게 저 세상 사람이 된 막내의 두 딸 가운데 첫째는 피아니스트의 꿈이 좌절되고, 둘째는 자신의 출생과 얽힌 비극을 천형처럼 안고 살면서도 늘 밝게 웃는다. 엄마와 딸, 언니와 동생, 할머니와 손녀로 그 인생사의 사연들이 이어지고 쌓이는 대목들의 전개가 무척 섬세하다. 그 사이사이에 보이는 벚꽃 흩날리는 경치, 설경, 바다, 대나무 숲, 갈대밭의 아름다움은 숨이 막히도록 황홀하다. 시골 마을의 작은 시냇가에 이리저리 번지는 반딧불의 동선도 흑백사진의 추억을 삽화처럼 떠올리게 한다.
누구나 인생은 아름답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는데, 돌연 기습하는 슬픔과 예상치 못하는 방향전환이 그 영혼에 상처를 낸다. 그런 가운데서도 다시 웃음을 되찾고 일어설 수 있다면 그로써 우리의 마음은 꽃밭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이 ‘플라워즈’다. 인간의 생애는 자기 하나로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 것 같지만, 그 인생의 내면에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이 담겨 있고 아버지, 어머니가 존재하며 자식의 생애로 연결되어간다. 우린 어떤 사연과 추억 그리고 일깨움을 그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며 살고 있을까? 100년의 시간 속에서 피어나고 또 피어나는 꽃들이 어느새 물결이 되어 강처럼 흐르는 걸 보고 싶다.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