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가 조심스런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최근에 동생이 큰 수술을 마쳤는데 담당의사에게 사례비를 줘야 하냐는 것이다.
“왜? 아니, 전혀.” 나는 답했지만 그녀는 한숨을 몰아 쉬며 사정을 설명했다. “아니 우린 아파 본 적이 없어서 전혀 뭘 모르다가 같은 병실 안의 다른 아주머니들 왈 ‘젊은이들이라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지만 원래 의사 선생님들 수고비는 꼭 드려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코흘리개를 공립 초등학교에 보낸 지 어언 반년. 한 친구가 이야기해주길 아이들의 부모님 직업을 검색해서 부자 부모만 색출한 후 전화를 돌려 대놓고 명품 가방을 요구한 한 선생(차마 ‘님’이란 소리를 못 하겠다)이 있었단다. 엄마들은 밋밋한 비닐봉지에 티 안 나게 명품가방을 둘둘 동여맨 후, 심지어 돈봉투도 가방 안에 동봉해 보냈단다. 그런데 그 선생, 한 달 뒤에 그 학교를 그만뒀다.
한 번은 이웃에게 경비 아저씨의 불친절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더니 “아, 혹시 돈 안 갖다 드렸죠?”라고 반문해서 깜짝 놀랐다. 용돈이라도 가끔 쥐어드려야 아이들 등하교나 택배물 관리에 한 번 더 신경 써준단다.
물론 한 줌의 희망이라도 잡아야 하는 환자 입장에선 어리바리한 질문에 냉랭하게 돌아오는 의사의 피곤한 듯한 말 한마디에 상처받아 ‘내가 뭘 잘못했나?’ 싶고, 내 자식을 남 손에 맡겨놓고 불안한 엄마는 제 자식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무엇 하나 부족하거나 튀는 게 싫다. 한 아파트에서 매일 보는 사람과 어색하게 지낼 바엔 차라리 몇만 원 투자해서 속 편한 게 낫다는 게 공공의 상식일지도 모른다.
자신도 이 상황이 이상하다 생각되지만 분위기 편승 혹은 누락공포 때문에 굴복하는 것은 실은 상대를 경멸하겠다는 처사다. 앞에선 웃으며 굽실굽실 ‘잘 부탁드립니다’, 뒤에선 ‘돈 받아먹는 X’라며 조롱하는 게 하나의 익숙한 관계의 습성으로 굳혀간다.
점차 존경과 권위, 봉사와 서비스의 숭고한 가치가 ‘얼마면 되니?’로 바뀌는 것, 이런 게 자본주의인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