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부’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공주의 갑부 김갑순이다. 그는 원래 공주 감영에서 잔심부름하던 노비였다. 그러다가 의남매를 맺었던 여인이 충청감사의 첩이 되면서 노비 신분을 벗고 하급 공무원이 되었다. 그 다음에 그에게는 또 한번의 기막힌 인생 반전이 이루어진다.
김갑순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어느 날 석양에 공주 감영을 찾아온 허름한 차림의 한 선비를 만난다. 이 선비는 자기의 가장 친했던 친구인 충청 감사를 찾아 자기 딸 혼수 비용의 도움을 청하러 왔으나 충청 감사는 면회조차 거절한다. 딱한 사정을 들은 김갑순은 당나귀에 광목과 돈을 실어 혼수 비용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이 선비가 후에 호조판서가 되어 사람을 공주로 보내 김갑순을 서울로 불렀다.
이때부터 김갑순의 출세 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부여 임천, 아산 군수 등을 역임한다. 그가 아산 군수 시절에 일제는 민심 회유책으로 밀린 세금을 전액 감면해주는 특별 사면령을 내렸다. 이 사면령의 혜택으로 김갑순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김갑순은 그 후 부를 이용하여 권력자와 친하게 지내면서 대전이 호남선의 출발점이 된다는 정보를 빼내 대전 전체 토지의 40%에 해당하는 22만 평을 사들였다.
김갑순은 일본인 관리들에게 로비하여 충남의 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시켰다. 경부선 개통 이전에 1∼2전 하던 대전 토지는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오르기 시작해 도청 이전 후에는 100원 이상으로 치솟았다. 30여 년 만에 땅값이 1만 배로 폭등한 것이다.
그에게는 공주와 예산 일대에도 1000만 평의 토지가 더 있어 “김갑순의 땅을 밟지 않고는 대전과 공주 일대를 다닐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1911년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꾸준히 관변 단체에서 활동했다. 특히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에는 다른 친일파들처럼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흥아보국단 등 전쟁 지원을 위해 조직된 각종 친일 단체의 임원을 맡았다.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농지개혁의 실시로 그의 토지의 대부분은 유상 몰수되어 흩어졌다.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