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식은 평남 용강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후 진남포에서 미곡상을 시작으로 사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천부적인 상술과 뛰어난 친화력으로 그는 1924년 고향에서 선광당인쇄소를 시작했다. 2년 뒤 그는 사업무대를 서울로 옮겨 선일지물을 창립했다. 그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그는 주로 총독부 당국과의 친교를 바탕으로 식산은행·한성은행 등의 은행 돈을 최고 수백만원까지 끌어다가 사업자금으로 활용했다. 귀족 가문들은 일찍이 금융업에 진출했고, 지주 가문들은 1920년을 전후하여 제조업에 진출하였는데 이들과 달리 그는 상업자본가로서 성장했다.
그는 1931년 종로 네거리에 우리나라 현대식 백화점의 시초인 화신백화점을 설립했다. 화신백화점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사은 경품 판매와 연쇄점 운영 등으로 급성장했다.
1937년께에는 최고 번성기를 누려 전국에 연쇄점만 350개가 넘었다. 당시에는 면직물 수입이 급증하고 고무신 등의 소비재가 대량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급과 수요는 여전히 전통적인 장시(場市)나 지방상점에 의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1934년 화신연쇄점을 추진하여 전국적 유통체계를 구축했다. 특히 화신백화점은 일본의 오사카영업소를 통해 일본 상품을 다량 수입하여 국내에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1938년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의 강요에 따라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비행기를 제작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조하였고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했다.
해방 후 그는 반민족특위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보석으로 풀려났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5·16 군사정변 후에는 송도해수욕장 개발권과 화학섬유공장 설립권을 얻어 사업 재개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막대한 외자를 투입한 흥한화섬이 1969년 한국산업은행 소유로 넘어가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 1972년 일본의 소니사와 합작하여 설립한 화신산업이 부도를 내면서 그의 경제활동은 끝났다. 그는 화신그룹의 총수였으며 전형적인 상업자본가였다.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