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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만에 거부된 여사 왕재덕

왕재덕 여사는 황해도 신천에서 왕시권의 2녀로 태어나 17세에 이영식에게 시집갔다. 여사의 나이 29세 때 남편이 돌아갔지만 2남1녀의 어머니로서 자녀들을 잘 키웠고, 여자 혼자의 몸으로 40년 만에 거부가 됐다. 남편에 죽을 때 남겨준 재산은 300석을 추수할 2만원의 재산이었는데, 그 동안에 20배로 늘려 6000석을 추수할 40만원의 거부가 되었다.

여사가 재산을 늘린 첫 번째 비결은 부지런히 쉬지 않고 일한 덕분이다. 여사는 목화 재배가 다른 농사보다 이익이 많이 남기 때문에 중점적으로 재배하였는데 저녁 늦게까지 일하였으므로 목화밭에서 사기 파편이나 흰 돌까지 목화타래인줄 알고 줍기까지 했다.

두 번째 비결은 경지정리사업이었다. 싼값의 나쁜 토지를 매입해 언덕을 낮추고 자갈을 골라내 좋은 토지로 만들었다.

세 번째 비결은 수확물을 신천장에 내다 팔지 않고 우마차나 선박을 이용해 멀리 진남포에 가서 매매하며 고가로 팔 수 있었다. 당시는 교통이 불편해 남자들도 엄두도 내지 못했던 물량의 대량 이동이었는데 여사는 과감하게 이를 실천에 옮겨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그러나 여사는 세력가와는 과감하게 맞서 싸웠다. 일진회의 간부였던 송병준이 신천의 땅을 사서 논을 개간하려고 할 때 이에 맞서 재판 끝에 이 땅을 매입했다. 또 조선철도주식회사에서 신천과 사리원을 연결하는 철도를 부설하고, 신천에 온천을 개발해 유명한 관광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신천에 호텔을 지으려고 역 주위의 땅을 매입해 공사를 추진했다. 이 부지 내에 여사의 땅 99평이 있었는데 매매 계약도 하지 않고 공사를 추진했다. 여사는 오랜 재판 끝에 이 땅을 사수해 그 공사를 끝내 중단시켰다.

여사는 1929년에는 쌀 600석에 해당하는 4만원을 투자해 신천농민학교를 설립하며 농촌 지도자를 양성했고, 1934년에는 12만원을 다시 투자했다. 여사는 이 해 영면했지만 할머니의 뜻을 이어 손자가 1936년에는 30만원을 투자해 신천농촌학교를 세웠다.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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