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이 전속력으로 질주하면서 슬쩍 발을 내지르는 듯했다. 그러자 마술처럼 공은 이내 주인을 바꾸었다. 파란색 유니폼은 당황할 사이도 없이 뒤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붉은색 유니폼의 달리는 각도를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방향을 틀어 꺾어지는 발을 걸기에는 상대가 너무나 빨랐다. 다른 파란색 유니폼이 몸을 날려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와 동시에 골문을 지키고 있던 사내가 튕겨 나오듯 붉은색과 엉키려는 찰나, 공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 되었다.
철렁, 하고 그물 안으로 공이 꽂히자 지진이 일듯 함성이 터졌다. 그리스 군단이 돌이킬 수 없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확정된 2대 0의 점수는 뒤집어지지 않았다. 경기 종료가 확실해지자 그리스는 유니폼 색깔처럼 새파랗게 질린 채 허탈해 했고, 코리아는 붉은색 유니폼처럼 한껏 홍조가 되어 하늘로 치솟았다. 아무리 되풀이해서 봐도 질리지 않는 이정수, 박지성의 골인 장면이었다. 전혀 무리 없이 가볍게 띄워준 공이 코리아와 그리스의 운명을 갈랐다. 무엇보다 정확히 보고 침착하게 마무리를 짓는 실력의 열매였다.
6월 12일 남아공 만델라 경기장이 쓴 역사였다. 아직 1승에 불과한 전적이라 긴장을 풀거나 자신감만 내세울 수도 없지만, 기대 이상의 경기는 그걸 보고 있던 전 세계 코리안들의 심장을 뛰게 하였다. 첫 경기의 호조는 선수들의 기를 살리는 것은 당연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더욱 두텁게 한다. 그건 팀 모두에게 보이지 않는 엄청난 자산으로 작동하게 마련이다. 그리스 골 수문장이 자기 팀 선수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성질내는 장면이 잡힐 때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이미 결정된 셈이었다.
그 어느 것도 억지로 되지 않는다. 무리수를 둔다고 되지도 않을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꾸준한 노력과 침착한 마음, 정확한 시선, 그리고 서로에 대한 믿음과 격려가 승리의 신화를 창조해나간다. 전 세계가 보는 무대 위에서 펼쳐진, 코리아의 20∼30대 청년들이 보인 힘의 정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데, 우린 지성이가 감천하는 걸 보고 있다. 그가 주장이다. 주장 한번 잘 뽑았다. 어디 그게 축구에만 한하랴? 주장들, 좀 잘해다오 부디. 완장만 차고 있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