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의 조선 부자는 왕실재산을 관리하여 거부가 된 이용익, 명성황후의 친척이었던 민영휘, 동아일보를 창간한 호남의 지주 김성수 등인데 이용익과 민영휘는 재산이 1000만원대였고 김성수는 500만원 정도였다. 이에 버금가는, 연해주에서 1000만원대의 재산을 가진 부자가 최봉준이다.
최봉준은 함경도 경흥에서 태어나 1860년경에 연해주로 이주한 최초의 13세대 가구 중의 한 가구였다. 이들은 연해주에 도착하여 삽과 곡괭이로 농토를 개간하여야 했기 때문에 성과도 나지 않고 고생이 막심하였다. 최봉준은 겨울에는 러시아인이 사는 도시나 마을에 가서 품삯을 벌었다. 하루는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가 허허벌판에서 눈보라를 만났다. 계속 걸어도 광대한 눈밭뿐이고 추위는 살을 에는 듯하였다. “여기서 잠들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엉금엉금 기다가 정신을 잃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따뜻한 난로 때문이었다. 그를 구출한 사람은 러시아의 귀족인 야린스키였다. 야린스키는 그를 잘 돌보아 주고 자신의 집 농장을 관리하는 일을 맡겼다. 최봉준은 성실하게 일했으므로 야린스키의 마음에 들었다. 아들이 없던 그는 최봉준을 아들처럼 사랑해 주고 “하루하루를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살라”는 유언과 함께 많은 재산을 남겨 주었다.
그는 이 돈을 밑천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가게를 열었다. 이때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러시아 군대가 많이 주둔하였다. 그는 러시아 군대에 소를 납품하기 시작하였다. 함경도에서 소를 사서 원산항에서 배로 운반하여 납품하므로 러시아의 소보다 3배나 싸게 공급할 수 있었으므로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많은 돈을 번 최봉준은 민족의식도 강하여 황성신문의 주필이었던 장지연을 연해주로 모셔다가 “해조신문”을 창간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의 변호사 비용을 부담하기도 하였다.
최봉준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러일전쟁의 포화 속에 뛰어 들어 기회를 살려 막대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