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끈 바람이 분다. 그러나 그 바람이 지나는 자리에서 춤추듯 흔들리는 해안의 야자수는 뜨거운 태양을 향해 시원하게 팔을 펼친다. 아니 그건 보면 볼수록 아득한 선사시대 원시림의 녹색 깃털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진화를 거부한 채 뿌리는 모래 속에 두면서도, 몸은 하늘을 향해 날고 싶은 것인가? 자작나무처럼 희고 긴 허리에 벌거벗은 열정이 스며들면서 투명한 바다의 풍경화가 되고 있다. 이윽고 황금빛 낙조(落照)가 수채 물감처럼 번진다. 남태평양 노을의 황홀함이 순간 신의 예술을 보여준다.
일본의 이른바 ‘대동아 전쟁’이라는 악마의 욕망이 난도질하듯 포격하던 시간에도, 제국의 마수에 끌려간 우리 땅의 젊은이들이 ‘남쪽 나라 십자성’이라고 노래했던 동남아시아 열대바다로 이어지는 섬 ‘괌’. 16세기부터 스페인과 미국, 일본 다시 미국으로 그 주인이 바뀌어 오늘에 이른 슬픈 식민의 역사를 지닌 남태평양 열도 가운데 하나. 원주민은 그 사이에 관광자원이 되고 주변의 작은 섬들인 마이크로네시아 사람들은 이곳으로 흘러와 하층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한다. 영어가 공식어인 이곳에서 그들은 벙어리와 다를 바 없는 원시언어의 계승자처럼 존재한다.
학기가 끝나며 며칠 떠나온 이곳에서 고생대 자연의 아름다움과 원시를 유린한 근대 역사의 경계선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하와이로부터 필리핀 군도에 이르는 태평양의 무수한 점들이 길고 길게 이어져 19세기 제국 아메리카의 영토가 되고, 그곳에서 살아온 이들은 졸지에 “역사 없는 토착민”이 되었다. 그러면서 괌은 이국 방문자들의 휴양지로 변모하고 말았다. 휴양지라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휴양지의 주인 명단에서 이 섬의 원주민들은 배제되고, 하인으로 전락한 것이 문제라는 뜻이다.
자연 앞에 솔직한 아이티의 여인들을 보았던 고갱의 낭만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전설이 됐지만, 그건 그래도 여전히 꿈꾸고 싶은 갈망이다. 남태평양 원주민들의 원색 생명력이 그대로 살아있는 해변을 보며 기뻐할 순 없을까. 바닷물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석양은 그런 그림과 아무래도 어울린다. 원주민이 사라진 자연은 아무리 떠들썩해도 어디서나 왠지 외로운 표정이다. 자연은 자기를 온통 믿고 맡기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