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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로 빛바랜 김성수의 뚝심

인촌 김성수는 1891년에 전라도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김경중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세 살 때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들어갔다. 인촌 집안은 호남의 대지주이며 조선에서 알아주는 3대 부잣집이었다.

인촌은 6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다가 17세인 1908년 10월 상투를 자른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사죄의 편지를 부모에게 남기고 친구 송진우와 함께 군산항에서 일본행 배를 탔다.

일본 도쿄로 건너간 후 1910년에는 일제가 한일합방을 강행하자 많은 유학생들이 귀국했지만 인촌은 1914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6년간 유학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김성수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는 민족자본으로 만든 기업이 있어야 하고, 근대화된 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해야 하며, 민족의 의사를 대변하는 언론 기관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굳혔다. 그는 호남의 대지주로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버리고 1919년에 경성방직을 설립하였으며,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해 민족교육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함으로써 숙원이었던 고등교육기관 설립의 꿈을 이룩하였다.

해방 후 1946년에는 보성전문학교를 개편하여 고려대학교를 발족시킴으로써 민족사학의 터전을 다졌다. 1920년 4월에는 동아일보를 창간함으로써 언론을 통한 민족의 실력 양성과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해방 후에는 한국민주당의 당수를 맡고, 1951년 5월 피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이승만과 의견이 맞지 않아 1년 만에 사임하였고, 1955년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인촌은 혹독한 일제 시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민족을 위하여 다방면에서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제 말기에 친일파로 변절했었다는 주장 때문에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가 많이 절하되어 있다. 친일파 청산은 우리가 청산해야 할 역사적 사명 중 하나이지만, 단순히 인촌을 친일파로 지목하여 그의 업적을 묻어두기엔 그가 민족 교육과 경제, 언론 등에서 남긴 업적들이 현재까지도 이어져 너무나 크게 자리하고 있다.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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