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워진 날씨다. 장마까지 겹치면서 도시는 찌는 듯한 습기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청결한 바람 한 점 불어주지 않는 인조 도시의 공간에서 이런 더위는 결국 또 다른 인조 바람인 에어컨에 기댈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러나 거기에 오래 노출되면 건강을 해치고야 만다. 딜레마다. 여름은 더워야 제격이지만, 그것도 다 자연의 섭리 속에서는 보충기능이 마련돼 있어야 의미가 있다. 나무 그늘이 여기저기 있고, 냇가의 물속에 풍덩 하고 몸 던지는 재미가 있어야 그 더위가 우리의 기운을 돋우어준다.
문명을 자연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로 측정해왔던 시대는 오랜 역사를 지닌다. 고대 인류의 문학 ‘길가메시의 서사시’에서 영웅 길가메시는 숲의 신 훔바바와 싸운다. 그건 문명의 탄생에 얽힌 사건을 상징하고 있다. 숲은 인간에게 미지의 어둠이기도 하고 정복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 격투의 과정에서 인류는 숲을 밀어내고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는 거대한 작업을 해왔다. 그런데 숲의 정령 훔바바가 제거되면서 인간은 승리한 것 같지만 결국 자신에게 생명의 공급처가 되는 자리를 점점 잃어버리고 말았다. 산업화라는 기계장치는 그 숲을 깎아내고 밀어낸 괴력이다.
이걸 뒤늦게 깨우친 인간은 숲의 일부를 도시에 다시 옮겨 심어보기로 했다. 녹색공간의 출현은 그런 고민의 결과다. 그러나 오늘날 이마저도 돈이 좌우하는 시대다. 고급 아파트는 녹색공간에서 그 특권을 누린다. 자연과의 호흡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 권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들 산과 들로, 강으로 바다로 짐을 꾸려서 떠난다. 하지만 모두가 그러는 판국에는 오고 가는 길이 피곤하기 그지없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도 도시에서 자연의 기운을 만날 수는 없는 것일까? 거리를 거닐면 생태학습이 저절로 되고 도서관에서는 자연친화적 인문학 강좌가 펼쳐지고 그런 내용을 담은 작은 영화제가 여기저기서 도시인들과 이방인들을 불러들이는 마을은 어디 없는가?
뉴타운이라는 개발꾼들의 돈 장사와 기업도시 등으로 우리의 주거공간이 화폐로 환산되는 방식을 이쯤 해서 접지 않으면, 우리는 녹색의 권리를 박탈당한 채 시들어갈 것이다. 그 권리가 현실이 되는 도시가 다름 아닌 명품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