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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제일반

자수성가로 독립자금 댄 김기덕

김기덕은 함북 부령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들이 고등학교나 대학으로 진학할 때 “돈 없는 사람은 공부도 못하는구나” 한탄하며 돈을 벌어야하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경성(鏡城) 함일학교를 마친 후에 청진으로 이사하여 일본인과 사귀면서 일본어 공부에 열중하였다. 1913년경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약 2년간 일본 상인들과 거래하면서 일본인들의 감정을 터득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후일 그가 총독부 관리 및 조선은행의 일본인 고위층과 가깝게 지내면서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는 커다란 밑천이 되었다.

그가 맨 처음으로 시작한 사업은 러시아와의 무역이었다. 러시아의 연해주는 세계 3대 어장의 하나로 해산물이 풍부하였으므로 이것을 무역하여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무역으로 번 러시아 돈으로 화폐 교환 장사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재미를 보았지만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화폐가 폭락하여 대단한 손해를 보았다.

화폐장사로 실패한 그이지만 여기서 주저앉지 않고 이번에는 토지 거래를 시작하였다. 은행 돈을 얻어 함경도의 유망한 지역의 토지를 사서 비싸게 팔아 금방 100만원의 거액을 벌었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진 곳은 나진항이었다. 그는 웅기에 300만 평, 나진항에 150만 평의 토지를 확보하였다. 나진항은 개항된 지 10여 년밖에 안 되는 곳으로 수년 전만 해도 인구 100호 정도의 어촌이었다. 땅 한 평에 고작 1, 2전이었지만 200배로 폭등하여 30, 40원이 되었으므로 4, 5만원 투자한 돈이 천만원대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횡재는 나진항이 일본의 대륙정책을 추진하는 최대의 관문이 되리라고 미리 예단한 그의 통찰력의 결과였다.

청진에 청덕학교를 설립하였고, 서울에서는 한성학교를 후원하였다. 동생 김기도를 통하여 많은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였다. 광복 후 월남하여 고려흥업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중석(重石)을 해외에 수출하여 성공하였으며 서대문에 금화장을 짓고 살았다. 김기덕은 자수성가형의 상인이라기보다는 모험적이고 투기적인 기업인이었다.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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