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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제일반

남의 재산 빼앗아 갑부된 민영휘

민영휘는 명성황후와 촌수는 먼 편이었지만 민씨 일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청나라 군대를 이용하여 친일 개화 세력을 몰아냈으며, 위안스카이와 결탁한 뒤 사대당 내각에 들어가 전권을 휘둘렀다. 1889년부터 1891년까지 형조·예조·공조·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민씨 세력의 우두머리 역할을 담당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갑오경장으로 실각하였고, 탐관오리로 분류되어 전라도 임자도로 유배되었다.

민영휘는 절대 권력을 쥐고 있을 때 그 권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재산을 탈취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갑오경장 후에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이 모여들어 재판소에 호소하기도 하고 그의 집으로 달려가 칼로 위협하여 재산을 되찾아가기도 하였다. 그들은 또 각 신문에 그의 악행을 날마다 공개하므로 민영휘는 매우 걱정이 되어 변호사에게 후한 뇌물을 주어 재산을 빼앗긴 민간인들의 소송을 맡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다. 또 신문사에는 자신의 악행을 은폐해 달라고 애걸하였으나 신문사는 그가 악행을 은폐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말까지 보도하자 민영휘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가족을 데리고 상하이로 망명을 시도하였다.

정계에서 물러난 후에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세상에서 서양 사람들이 뛰어난 까닭은 교육을 장려하여 남녀 모두가 배웠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일본만이 교육에 힘썼기 때문에 갑자기 강해졌다”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1906년 휘문고등학교의 전신인 휘문의숙을 설립하였다.

민영휘는 경제에 밝아 재물을 잘 불려 일제 강점기 동안 누구나 인정하는 조선 최고의 갑부였다. 그의 재산은 한때 4000만원이었지만 여러 가지 실패로 1200만원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조선의 3대 부자의 한 사람인 김성수의 재산이 500만원이었던 점과 비교하면 그가 얼마나 부자였는지 짐작된다. 귀족 출신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대자본가로 변신에 성공하였다.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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