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아저씨는 우선 편안하다. 생긴 것도 수수하고 정겨우며, 뭔가 급한 일이 생기면 당장 달려와 도와줄 것만 같다. 아무런 경계심을 품을 이유도, 서먹함도 없다. 그렇게 ‘옆집 아저씨’는 인정 많은 동네 이웃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혹시 나와는 너무 거리가 먼 세상에서 살고 있고 대하기 어려운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이른바 명사들이 ‘옆집 아저씨’ 같으면 그 순간 우리는 예기치 못했던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리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게 되었다. 그러니 옆집 아저씨는 더더군다나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 수도 없다. 서로 마주쳐도 아는 척하지도 않는데 어찌 알겠는가?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나이가 많건 적건 간에 딸아이라도 있다면 옆집 아저씨의 존재는 어느새 잠재적 위험인물의 명단에 오른다. 당사자로서는 기가 막힐 일일 수 있지만, 세상 인심이 그렇게 변해버렸다. 아니 인심이 변한 것이 아니라 ‘옆집 아저씨’가 달라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옆집과 내 집에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그런데 그 경계선은 이제 사유재산의 영역을 표시하는 의미를 넘는다. 경계(境界) 아닌 경계(警戒)를 위한 선이 되었다. 이런 때에는 친절한 것도 수상해 보인다. ‘옆집 아저씨’는 공포가 되고 있다.
영화 〈아저씨〉는 이런 현실에 대해 기습에 가까운 일격을 가한다. 주인공 원빈은 이제 더는 반항적이고 우수에 찬 동생이 아니라 아픈 과거를 지니고 있지만 책임 앞에서 단호한 어른의 기운을 뿜어낸다. 그 아저씨가 범죄로부터 목숨을 걸고 지켜내려는 소녀는 자신의 전당포 가게 바로 옆집 아이다. 생각보다 조숙한 아이의 그 눈빛은, 그렇지 않아도 외롭고 힘든 세상에서 폭력의 대상이 되고 있는 존재들에게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 줄 이웃은 없느냐고 묻는다.
상대가 혹시 늑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굳어져 가는 사회에서 ‘옆집 아저씨’는 이렇게 우리 사회의 구원의 문제가 되고 있는 중이다. 늑대들이 온갖 종류의 아저씨 탈을 쓰고 여기저기 활보하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사실 어디 딸아이만 걱정되는 세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