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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제일반

흔적 없는 소멸은 없더라

“몸땡이 가진 것들은 마카 설웁제. 마카 서러워서 서루 만내가지고 지지구 볶고 지랄 발광을 하는 기래. 그러니 서름도 쪼매 있기는 있어야 되는 건가.”

연극 ‘하얀 앵두’의 곽지복의 대사는 쓸쓸한 인간의 육체를 따뜻한 등불이 밝혀준다. ‘하얀 앵두’는 몸땡이를 가져 서러운 모든 존재를 위로하는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은 영월, 50억 년 전 삼엽충 화석을 반야산이 키우는 늙은 개인 원백이 물어온다. 이 화석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커피 원두 같은 삼엽충이 들어 있는 화석은 발견된 장소를 모르면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지질학에서 화석 연구는 화석 자체가 아니라 화석이 발견되는 순간, 즉 발견되는 위치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5억 년 전 플랑크톤을 쫓던 삼엽충이 쓸모없는 화석이 되고, 이 쓸모없다고 여기던 화석이 어떤 이에게는 조급증의 효능을 보이는 약이 된다. 존재하는 것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나름의 의미를 남기고 흔적을 만든다.

반야산의 늙은 개 원백이가 곽지복의 젊은 암캐를 겁탈하고, 서른다섯의 윤리 선생은 고등학교 2학년인 반야산의 딸을 임신시킨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는 어느새 가해자가 되는 순환의 고리는 인간과 동물, 그리고 식물 사이에서도 작용한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정원과 그곳에 있던 하얀 앵두를 그리워하는 반야산. 출세와 명예를 위해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시달리는 권오평.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는 엄마 하영란, 젊은 날 모든 것을 잃고 헛헛함을 견디며 늙어가는 노인 곽지복. ‘하얀 앵두’에 나오는 인물들은 비어 있고 부족하고 쓸쓸한 존재들이다.

이처럼 작품 속에는 사라지는 것의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사라져버린 하얀 앵두, 시간 속에 묻혀버린 화석, 그리고 원백이의 죽음. 그러나 작품은 소멸에서 멈추지 않는다. 원백이가 새끼를 남기고 딸 지연이가 그냥 꽂아놓은 가지가 개나리꽃을 피우듯 ‘하얀 앵두’는 소멸 뒤에 오는 생성을 강조한다.

서정적이고 삶의 깊이가 묻어나는 대사들, 곽지복과 조교 이소영의 캐릭터가 만드는 유쾌함, 삶의 아이러니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낼 줄 아는 넉넉함이 있어 ‘하얀 앵두’는 140분 짧지 않은 공연 내내 훈훈한 감동을 준다. 29일까지 두산 아트센터 스페이스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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