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각 도 계수관의 첫머리를 따서 도명을 정하였다. 충청도는 충주 청주의 계수관의 명칭을 딴 것이고,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의 명칭을 따서 도명을 정한 것이다. 그런데 계수관인 지방에서 반란 등이 일어나면 그 고을의 품격이 강등당하여 계수관의 지위를 잃게 되며 자연히 도명도 변경하게 된다.
8도 중에서 충청도의 도명 변경이 유난히 많아 무려 16회에 걸쳐 변경이 있었다. 이는 조선시대 충청도에서 반란이 많았다는 증거이다. 물론 다른 도에서도 반란이 있어 전라도의 경우 전광도, 전남도 등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경상도와 평안도 지역 등은 일본과 중국과의 외교 문제 때문에 비록 그 도에서 홍경래의 난과 같은 반란이 일어나도 도명을 바꾸지 않았다.
충청도 도명의 변천을 대략 소개하면 1505년(연산군 11)에 충공도로 개칭하며, 1550년(명종 5)에는 청공도로, 1613년(광해군 5)에는 공청도로 개칭하였다. 1628년(인조 6)에 공홍도로, 1646년(인조 24)에 다시 홍충도로 개칭하였다. 1656년(효종 7)에 공홍도로 고쳤고, 1670년(현종 11)에는 충홍도로, 1681년(숙종7)에는 공충도로, 1735년(영조 11)에는 공홍도로 개칭하였다. 1777년(정조 원년)에 공충도로, 1804년(순조 4)에는 공충도로, 1862년(철종 13)에는 공충도로 다시 고쳤다. 공충도가 여러 번 되풀이된 것은 도명이 변경되어도 10년이 지나면 다시 충청도로 환원되었기 때문이다. 충청도에서는 충주와 청주 대신에 공주와 홍주가 계수관이 된 경우가 많았다.
《택리지》에서는 충청도의 인심을 “오로지 권세와 재리를 쫓는다”라고 하였다. 이 지방에는 중앙에 다시 진출하려는 대망을 품은 사대부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중앙 정계로 진출을 꾀하였기 때문에 반란 세력으로 몰리는 경우가 많았다. 충청도 사람들을 느리다고 하는데 이것은 많은 변란 중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말을 천천히 사려 깊게 해야 하고, 행동을 신중히 해야 했기 때문이며 이것이 관습화된 결과가 아닐까.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