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같이 붉은 입술’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세상에 ‘하얀’ 앵두가 있단다. 없는 줄 알았는데 있는 것, 그게 이 ‘하얀 앵두’ 속에 담긴 메시지인 셈이다. 연극 〈하얀 앵두〉는 그렇게 우리의 삶 속에서 사라지고 저물어 가버린 인생의 사연들을 하나하나 풀어 아파하게 하고 다시 마음을 추슬러 일어서게 한다. 뼈아픈 상실을 혼자 속절없이 앓고 있는 이들의 가슴에 흐르는 눈물을 서로 닦아주는 일은 그래서 하얀 앵두다. 없는 줄 알았는데 이게 있다.
강원도 영월의 산골 어느 집에 한때는 이름을 날렸다가 이제는 초라해진 작가와 그의 유명하지 않은 배우 아내, 그리고 고등학생 딸이 들어와 살게 된다. 5억년도 더 되는 희귀종 삼엽충 화석을 발굴하면서 지질학 연구를 하는 교수와 그의 박사과정 제자가 등장하고, 여기에 젊은 시절 명태어선을 탔다는 노인이 인연을 맺게 된다. 작가는 병으로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고 그의 작품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아내는 여전히 무명의 시절을 보내는 연기자이고, 딸은 어느 날 덜컥 임신한 몸이 되어 17살 차이나는 학교 선생님을 신랑 후보감으로 대동하고 나타난다. 남자는 딸아이의 윤리 교사였다.
지질학 교수는 자기 연구에 몰두하다 아내가 사망한지도 몰랐고, 제자는 이런 선생을 막무가내로 짝사랑하지만 상대는 반응이 없다. 노인은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뒤 간첩 혐의로 7년 옥살이를 하고 밖으로 나와 보니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사라졌다. 극에는 보이지 않게 등장하는 원백이라는 늙은 개는 이 노인이 기르는 복순이와 생애 두 번째이자 마지막 수놈 구실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뜬다. 하나같이 세월이 아프고 “결핍된 생애”를 지낸 존재들이다.
분단의 현실로 벽에 유폐된 채 지내야 했던 사나이의 이야기를 담은 〈벽 속의 요정〉으로 주목받았던 배삼식의 창작극 〈하얀 앵두〉는 결핍된 생애의 한복판에서 삶의 온기를 회복하기 위해 정작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 묻고 있다. 삼엽충 화석을 만지작거리며 몇 억 년이라는 아득한 시간과 우리가 지금도 만나고 있다며 시작된 연극은, 그 오랜 시간 속에서 여전히 윤회처럼 되풀이되고 있는 우리 인생사의 슬픔과 사랑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상대의 가슴에 고인 눈물과 아픔에 깊이 귀 기울이는 사람이 곧 하얀 앵두가 된다. 그러나 그 가슴은 그 어떤 붉은 앵두보다 더 붉을 것이다. 우린 지금 몇 그루의 앵두를 자기 뜰에 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