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去龍仁)이라는 말은 “살아서는 진천에 살고 죽어서는 용인에 산다”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말이 전해지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첫 번째 전설은 옛날에 진천과 용인에 추천석이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살고 있었다. 진천에 사는 추천석은 농사짓는 착한 사람이었고, 반면에 용인에 사는 추천석은 부자이지만 심술이 궂고 마음이 곱지 않은 사람이었다. 염라대왕은 용인에 사는 추천석을 괘씸하게 여겨 저승사자로 하여금 잡아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저승사자가 실수하여 진천의 추천석을 잡아 왔으므로 다시 돌려보내려 하였으나 이미 진천에서는 장사를 지낸 후인지라 용인의 추천석을 잡아들이고 그 시체에 진천 추천석의 영혼을 넣어 환생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서는 진천에 살고, 죽어서는 다시 환생하여 용인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옛날 한 여자가 용인으로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고 잘 살았는데 남편이 죽자 진천으로 개가하여 그곳에서도 아들을 낳고 즐겁게 살았다고 한다. 그 후 용인에 사는 아들이 성장하여 진천의 어머니를 모시고자 하였으나 진천의 아들이 극구 반대하여 결국 관청에 고소장을 내었다. 관청에서 판결하기를 “너의 어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진천의 아들이 모시고 살고, 죽은 후에는 용인의 아들이 제사를 모시도록 하라”고 하였다. 위 두 가지 이야기가 모두 전설이지만 첫 번째 전설은 부자일수록 주변 사람에게 덕을 베풀라는 뜻이고 두 번째 전설은 전통적인 효 사상을 강조한 전설이다.
진천 지방은 옛날부터 평야가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되고 인심이 좋아 살 만한 곳이다. 1932년에 편찬한 진천군지에도 연간 쌀 수확량이 6만여 석인 곡창지였다. 용인은 산세가 좋아 고려시대 정몽주의 묘, 조선시대 이자의 묘, 김사필의 묘 등 사대부가의 묘소가 많았다. 이와 같이 용인에는 명당지가 많았기 때문에 그래서 죽어서는 용인에 산다고 하였을 것이다.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