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산을 깊숙이 파고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인적 즐비한 큰길을 가로질렀다. 다시 정상을 향해 오르는 냥 가파르게 치솟더니 땀을 식히고 주위를 둘러보라며 오붓한 오솔길을 선사했다. 길은 산에 생채를 내지 않으면서도 산과 조우했고 길 이쪽의 인간과 저쪽의 생태가 서로를 존중하게 했다. 그래서 길은 의도하지 않게 자연에 적대적인 행위가 되던 산행을 ‘더불어 산’으로 만들고 있었다. 지난달 7일 1차로 길을 연 북한산둘레길은 그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산과 만나는 법을 알려주는 중이다.
북한산과 도봉산의 산자락을 휘감는 두 개의 동심원 가운데 우이동∼정릉∼은평뉴타운∼북한산성∼고양시효자동∼우이동을 잇는 44㎞의 첫 동심원이 열렸다.
길을 따라 설치된 9개의 전망대와 35개의 쉼터가 산에 든 인간을 위한 배려라면, 산을 에두르긴 하지만 침입하지 않는 길은 자연을 위한 제한이다.
길은 짧게는 1.5㎞(마실길)부터 길게는 6.8㎞(우이령길)로 모두 13개 구간으로 나뉜다. 지난달 29일 북한산생태공원상단부터 진관생태다리 앞으로 이어지는 구름정원길(4.9㎞) 구간을 찾았다. 북한산둘레길 탐방안내센터 자연환경안내원인 조정림(34)씨가 동행했다.
◆등산화·물 정도는 챙겨야
안내센터에서 출발한 둘레길은 인수동 골목을 따라 동네 텃밭을 지나더니 산으로 향하는 작은 길을 열었다. 코스는 등산보다는 덜하지만 산책보다는 난이도가 꽤 높다. 구간에 따라 정도가 달라 어린아이나 나이 드신 어르신이 오르기에는 어려운 곳도 있다. 조씨는 “공원길 정도로 보고 정장 차림에 구두 신고 오시는 분도 계세요. 하지만 둘레길 역시 등산로의 일부라 등산화와 물 정도는 꼭 챙겨 오셔야 해요”라고 말했다.
둘레길은 산자락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할 뿐 정상 정복을 거부했다. 산 정상부에 가까운수록 동식물의 서식지에 접근하게 되고 생태 균형은 무너질 수밖에 없어서다. 북한산은 정식 등산로 외에도 알게 모르게 형성된 샛길로 생태 파괴가 심각한 지경이다. 그래서 둘레길은 친환경산행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한다.
화계사를 지나 제법 가파른 계단 길을 올라 높이 12m의 구름 전망대에 다다르면 전면의 서울 도심과 후면의 북한산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인수봉과 만경대가 손에 잡힐 듯했고 도봉산의 오봉까지 또렷했다. 탐방객들은 전망대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으면서 땀을 식혔다.
조선시대 궁녀들이 찾아와 속옷을 빨았다던 빨래골까지 둘레길은 명료했고 오르내리기에 큰 부담은 없었다. 적당한 곳에 적당히 위치한 안내표지판이 발걸음을 이끌고 사면이 급해 미끄러지기 쉬운 길엔 데크가 설치됐다. 샛길을 막으면서도 적당한 전망을 터주는 방법으로 탐방객의 시선도 만족시켰다.
자연을 위한 배려도 세심했다. 철사나 못으로 설치된 기존 안내판과 달리 신축성이 있는 벨크로를 이용해 두른 안내판은 나무의 성장에 맞춰 늘리도록 했다. 탐방길 위 고사한 나무를 뽑아내지 않고 놓아둔 건 나무에 기생하며 살고 있는 생물을 위해서다.
◆성숙한 탐방문화 필요한 때
하지만 사람의 흔적 또한 명료했다. 전부터 사람 다니던 산길이었다고는 하지만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몰리면서 길 위로 나무 뿌리가 드러난 곳이 눈에 띄었다. 사람의 답압이 그만큼 세다. 주중엔 덜하지만 주말이면 탐방객 수만 명이 동시에 몰리면서 둘레길은 몸살을 앓는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산행 문화도 문제다.
“처음엔 우리집 앞이 둘레길이 됐다고 주변 마을 주민들이 좋아들 하셨는데 막상 시작하고 나선 불만이 크게 늘었어요. 둘레길을 찾은 분들이 쓰레기를 버리고 가거나 마을 길에서 소란을 일으키기도 하거든요. 둘레길은 탐방길이기에 앞서 동식물의 터전이자 주민들 주거지의 일부잖아요. 제대로 즐기려면 그만 한 배려도 필요합니다.” 조씨가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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