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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유통일반

전태일 분신 40주기에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30분경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의 한 젊은 재단사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고 외쳤습니다. 그가 숨져 가면서 외친 ‘8시간 노동’과 ‘휴일 보장’은 법에 보장된 노동자들의 기본권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노동자들의 최소한의 요구였습니다.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은 당시 한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습니다. 단병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나에게 전태일은 노동운동을 하게 된 동기이고, 표상이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또 ‘전태일평전’의 저자인 고 조영래 변호사의 부인 이옥경(당시 이대 학보사 기자)씨는 “노동자들의 삶이 그렇게 열악한 줄을 몰랐던 것이 부끄러웠다”고 회고했습니다.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미싱 시다로 직장 생활을 시작한 전태일이 분신을 감행한 것은 당시 한국 사회의 열악한 노동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꽃다운 나이의 10대 여공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 15시간씩 노동을 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장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인해 위장병 등 각종 질환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노동법은 그 어린 여공들을 보호해주지 못했습니다.

그 자신 역시 힘없는 노동자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이런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전태일은 인근의 재단사들을 규합, ‘바보회’ 등을 조직해 노동 실태 조사와 함께 이의 개선을 관계 당국에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엄혹한 군사정권하에서 그들의 요구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을 희생해 노동 현실을 고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40년 전 11월 13일, 그는 “내 죽음을 헛되이하지 말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습니다.

동료들이 기억하는 전태일은 당구·탁구 치기를 즐겼으며, 야외로 놀러 가서는 춤도 추고 유행가를 부르며 신나게 놀던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분신한 지 40년이 지났으나 며칠 전에도 한 노동자가 분신을 시도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으로 성장했으나 그 그늘은 여전히 짙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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