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운동권 세대들은 1970년대를 흔히 ‘긴조시대’라고 부른다. 여기서 ‘긴조’는 ‘긴급조치’의 약자다. 최근 대법원이 유신헌법하에서 취해진 긴급조치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려 주목을 끌고 있다. 이로써 박정희 정권 시절에 내려졌던 ‘정치재판’이 사실상 위법판결을 받은 셈이다.
집권 12년차인 72년 10월 17일 박 대통령은 정치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돌연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이른바 ‘10월 유신’이 그것인데 이는 법치의 근간을 뒤흔드는 초헌법적 조치였다. 국가긴급권을 발동해 국회를 해산하고,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비상국무회의에서 개헌안을 의결하였으며, 그해 12월 23일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진 대의원 투표를 통해 그는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유신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현저히 침해하는 한편 대통령의 권한을 극대화시킴으로써 박 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한 포석이었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이 같은 유신헌법을 토대로 탄생한 것이 긴급조치였다. 74년 1월 8일 정부는 긴급조치 제1, 2호를 발표했다. 내용은 개헌을 둘러싼 일체의 논의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 시 영장 없이 체포·구속이 가능하며, 일반 법원이 아닌 군법회의에서 다룬다는 것이었다.
정권의 탄압이 아무리 가혹해도 비판할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당시 (유신)헌법 개정 100만 명 서명운동을 벌이던 장준하·백기관은 74년 1월, “개헌이란 개자만 말해도 잡혀 가게 되었으니 이런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정권을 비판했다. 두 사람은 즉시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기소돼 비상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희생자는 유명 정치인만이 아니었다. 경기도 평택에 살던 오 아무개씨는 그해 5월 버스 옆자리에 앉은 여고생이 반공웅변대회에 나간다는 얘길 듣고 몇 마디 정부를 비판한 것이 화근이 됐다. 오씨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이듬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신세를 망친 셈이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70년대 긴급조치 위반으로 기소된 사람이 무려 1140명이나 된다고 하니 그 희생도 적지 않았다.
이번 대법원의 위헌 판결은 사법부 스스로도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법치를 수호하고 국민의 인권을 보호해야 할 사법부가 과거 권력의 시녀 노릇을 했음을 자인한 셈이다. 이제 남은 것은 헌법재판소의 긴급조치 위헌 결정이다. 이제라도 올바른 과거사 청산을 위해 헌재의 현명한 결정을 기대해 본다./정운현(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