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열풍이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가 쓴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이하 ‘23가지’)가 서점가의 핵으로 떠올랐다. 장 교수는 ‘쾌도난마 한국경제’ ‘사다리 걷어차기’ ‘나쁜 사마리아인들’ 등으로 일찍이 대한민국의 허리에 해당하는 30∼40대 화이트 칼라들을 끊임없이 자극해왔다.
‘23가지’에서 그는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더 위대하다”는 뜻밖의 화두를 던지고, “자유시장은 없다”고 말한다. 그의 화법은 ‘부자’와 ‘자기 계발’에만 몰두하는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연말연시 공적·사적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잠시 귀국한 장 교수를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장하준 교수는 “출구전략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충고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긴축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는 얘기였다.
“금리를 빨리 올려야 한다는 얘기에 찬성하기 어렵습니다. 금리는 언제든지 바꿀 수 있거든요. 너무 빨리 재정을 줄이면 경기가 하락하게 될 텐데, 한 번 미끄러지기 시작한 경기를 다시 부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2011년 한국 경제에 대한 경고도 했다. 그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나라가 한국”이라며 “물론 가장 빠른 속도로 회복하기는 했지만,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너무나 큰 상황이므로 사건이 터지면 한국은 또다시 휘청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 교수는 자본주의의 고향인 영국에서 학생들에게 자본주의를 가르치는 경제학과 선생이다. 하지만 시장주의에는 반대한다. 자본주의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장을 부정한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대목이다. 그가 시장주의에 반기를 든 이유가 궁금했다.
“시장만으로 자본주의가 굴러 갈 수는 없거든요. 국가를 통한 규제는 시장의 근저에 깔려 있는 개념입니다. 기업을 예로 들어 볼까요. 기업은 시장의 일부 같지만, 기업 내부는 사실 완전한 계획경제입니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여러 시스템이 뭉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시장주의자들은 다른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시장주의는 진정한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은 자본주의’ 모색해야
장 교수가 던지는 화두들은 좌파적인 성향을 띤 듯하지만, 때로는 우파들에게 환영받기도 한다.
이를 두고 벌어지는 ‘장하준 색깔론’에 대해 정작 그는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일축했다. 스탈린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우파이고, 히틀러 입장에서 보면 다 좌파라는 얘기다.
사안에 따라 시비를 가리는 게 중요할 뿐, 노선에 맞는 주장을 펼쳐야 한다는 생각은 편협하다고 못 박는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적도 있다. 국가가 주도하는 산업성장 정책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개발독재 부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예컨대 유럽의 대표적인 선진국인 스웨덴은 지금도 정부가 임금정책에 강력히 개입합니다. 이로 인해 소득의 절반가량을 세금으로 내고 있죠. 중요한 것은 사회적 합의라고 봅니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제약을 어디까지 가할 것인지 합의가 선행돼야 합니다.”
장 교수는 ‘23가지’에서 ‘더 나은 자본주의’를 주창했다. 자본주의는 반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고쳐서 쓰면 훌륭한 도구가 된다는 뜻이다. 그가 생각하는 ‘더 나은 자본주의’가 무엇일까.
“생활 수준이 너무 낮으면 인간다운 생활이 어렵겠지만 확실한 것은 일정 수준이 넘어가면 ‘부자=행복’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최근 경제가 급성장하고 소득 수준이 가파르게 상승한 브라질 상파울루에서는 기업인 납치가 신종 사업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기업인들은 방탄차량이나 헬기를 타고 다닙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런 사회에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시장주의는 성장을 담보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제가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