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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제일반

장영실은 중국 귀화인의 아들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였던 장영실(蔣英實)의 아버지는 중국의 소주·항주에서 귀화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동래부 기생이었다.

장영실은 노비였지만 재주가 많았으므로 세종이 발탁해 1421년(세종4)에 윤사웅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 천문 관측기구를 배워 오도록 했다. 귀국 후 장영실은 천문 관측기구의 제작에 몰두했으며, 그 공으로 1423년에는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상의원 별좌라는 관직까지 받았다.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이천과 함께 많은 천문 기구를 제작했다. 물시계인 자격루와 계절을 알 수 있는 옥루, 천문 관측기기인 대간의와 소간의,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와 천평일구(天平日晷), 혜정교와 종묘 앞에도 설치했던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을 제작했다.

이러한 공으로 1433년에는 3품관인 대호군(大護軍)으로 승진했다. 1434년에는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했고, 특히 1438년(세종 20)에는 서양보다 2세기나 앞서서 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를 만들었다.

천문기구 제작이 끝난 후에도 장영실은 철을 제련하는 금속 전문가로 관료생활을 계속했는데 그의 나이 61세였던 1442년(세종24)에 세종이 온천욕을 다녀오던 중 왕이 탄 수레가 갑자기 부서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수레 제작의 책임자였던 장영실을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몰아 처벌했다.

장영실은 세종으로부터 재능이 뛰어나다고 극찬받았고, 수많은 과학 기구를 제작한 한국의 에디슨이었다.

미천한 노비 신분에서 승진을 거듭해 정3품관인 상호군(上護軍)이라는 고위 관직까지 올랐다. 그런데 수레 한번 잘못 만들었다고 앞서 세운 수많은 공은 따지지 않고 처벌받았다. 기술자를 우대할 줄 모르는 조선 사회였기 때문에 근대사회로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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