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人 머니 산업 IT·과학 정치&정책 생활경제 사회 에듀&JOB 기획연재 오피니언 라이프 AI영상 CEO와칭 플러스
글로벌 메트로신문
로그인
회원가입

    머니

  • 증권
  • 은행
  • 보험
  • 카드
  • 부동산
  • 경제일반

    산업

  • 재계
  • 자동차
  • 전기전자
  • 물류항공
  • 산업일반

    IT·과학

  • 인터넷
  • 게임
  • 방송통신
  • IT·과학일반

    사회

  • 지방행정
  • 국제
  • 사회일반

    플러스

  • 한줄뉴스
  • 포토
  • 영상
  • 운세/사주
경제>경제일반

과거제 만든 쌍기는 중국 출신 귀화인

후삼국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건설한 고려는 많은 인재가 필요했기 때문에 귀화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고려는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중국과 거란의 인재를 대거 받아들였다.

고려는 통일신라 패망의 근본 원인을 소수 귀족 중심의 폐쇄성 때문으로 판단하고 인재를 널리 등용하기 위해 과거제를 실시했다.

과거제는 종래의 편파적이고 혈연적인 귀족 신분사회를 개혁해 비교적 능력 중심의 공정한 관료제 사회를 정착시키는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과거제도 설치를 최초로 건의한 사람은 쌍기(雙冀)인데 그는 후주의 귀화인 쌍철(雙哲)의 아들이다.

956년(광종 7) 후주의 사신인 설문우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병이 나서 돌아가지 못하고 귀화했다.

그는 958년에 처음 실시한 과거에서 지공거(知貢擧·각 지방에서 추천해 보낸 선비를 뽑는 책임관리)가 되어 시·부·송·책으로 시험을 봐 최섬(崔暹)·진긍(晋兢) 등 2인을 선발했다. 그 후에도 두 차례나 지공거를 맡아 과거제에 의한 인재 선발 제도를 확립했다.

최승로(崔承老)가 광종을 평한 가운데 “쌍기를 등용한 이후로는 문사(文士)를 높이고 중히 여겨 은례(恩禮)가 지나쳤다”고 했고, 이제현(李齊賢)이 쌍기를 평하여 “보탬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되 부화(浮華)의 문(文)을 주창해 후세에 큰 폐단을 남겼다”고 한 것으로 보아 광종의 개혁 정치를 적극 도왔던 쌍기의 활약은 당시의 귀족들에게는 많은 반감을 샀던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을 깨는 개혁은 그만큼 어려운 모양이다.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Copyright ⓒ 메트로신문 & metr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