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동안, 말썽부리는 아이들을 얌전하게 만드는 이야기쯤으로 기억했다. 주인공 메리 포핀스로 나오는 줄리 앤드루스와 굴뚝 소제부 역을 맡은 딕 반 다이크의 연기와 노래가 워낙 뛰어나, 두 사람의 흥겹고 매력적인 모습만 뇌리에 남아 있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또는 너무 어릴 때 봐서 그럴 수도 있다.
‘메리 포핀스’는 1964년 영화다. 몇 년 전 뉴욕 브로드웨이 뉴 암스테르담 씨어터에서 뮤지컬로 보았을 때도 영화의 잔상이 강한지 줄거리에 대한 이해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고정관념이라는 것이 한번 만들어지면 그걸 뒤집기는 쉽지 않은가 보다. 해석의 틀이 이미 정해져서 머리 속에서 새로운 사실과 의미를 접수할 의지가 없게 돼버리기 때문이다. 함께 똑같은 것을 보고 있어도 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도 다 이런 까닭이다. 시선이 어디에 집중돼 있는가에 따라 보이는 것은 사뭇 달라진다.
이번에 다시 보았을 때는 메리 포핀스가 들어간 집 주인의 성이 뱅크스(Banks)라는 것과 굴뚝 소제부 버트와 그의 굴뚝 소제부 동료들이 잔뜩 등장하는 대목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뱅크스는 은행(뱅크)을 다니는 중산층 가장이고, 만사에 자를 잰 듯 규격에 맞춘 삶을 지향한다.
사람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기 일에 파묻혀 주변에 누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눈을 돌리지 않는다. 돈은 벌지만 그 인생은 지루하고 답답하다. 약자들에 대한 동정심도 그와는 거리가 멀다.
메리 포핀스는 이런 틀에 갇힌 아이들과 삭막한 그 가정을 해방시키는 존재다. 한편 굴뚝 소제부 버트는 촌스런 사투리를 쓰면서 얼굴에 시커먼 재가 묻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열정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가난하고 힘은 없지만 그가 인생을 사는 방식은 거침이 없고 마음은 따뜻하며 생기가 넘친다.
자본을 쥐고 있는 ‘뱅크’는 사람들의 삶도 차가운 계산으로만 대하나, 굴뚝 연기로 상징되는 영국 산업 자본주의를 밑바닥에서 떠받치고 있는 노동자들은 인간성을 잃지 않고 있다. 메리 포핀스와 버트는 그래서 환상의 동지다.
물론 현실에서야 간단치 않다. 그러나 아무리 고되어도 잃어버리면 안 되는 건 꼭 붙잡고 산다면, 메리 포핀스와 함께 하늘을 잠시 날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굴뚝 소제라는 우리의 현실에 찾아올 메리 포핀스는 뉴욕 브로드웨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