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 어느 날, 라파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젊은이가 골동품상에서 기이한 나귀가죽 하나를 보게 된다. 가게의 주인인 노인은 그가 관심을 기울인 가죽에 적혀 있는 주문 같은 글자를 내보인다. 그건 아랍어였고, 라파엘은 그걸 유창하게 읽어낸다.
노인은 그 주문대로 할 것인가 하고 묻는다. 젊은이는 “나는 일찍이 공부하고 사유하는데 온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내게 일용할 양식조차 가져다주지 못했지요”라고 대답한다. 그러고 나더니 가죽을 붙잡고 “내가 바라는 모든 쾌락을 하나의 쾌락 안에 담아 주기를!" 하고 아까 본 그 마술 같은 주문대로 이루어질 것을 기원한다.
주문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가죽을 소유하면 원하는 대로 되겠지만 그 대가로 소망이 이루어질 때마다 목숨이 줄어든다.” 발자크의 작품 ‘나귀가죽’에 나오는 장면이다. 천재 파우스트 박사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죽음의 계약을 하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라파엘은 혁명의 시대를 거친 프랑스의 현실에서 자신의 이상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절망감에 빠져 욕망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한 선택을 하고 만 것이었다. 그건 파멸로 가는 길이었다.
나탈리 포트만이 주연한 영화 ‘블랙 스완’은 뉴욕 발레단의 발레리나 니나가 ‘백조의 호수’ 프리마돈나가 되면서 겪게 되는 사건을 보여준다. 그녀는 순수하고 나약한 백조의 연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관능적이고 악마적이기까지 한 흑조의 연기까지 동시에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 프리마돈나의 위치를 새로 입단한 동료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어갔다.
이렇게 위기에 몰린 니나는 서서히 자신의 내면에 자신도 모르게 웅크리고 있던 흑조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현실과 몽환 사이를 오간다. 그건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누가 진짜 자신의 본래 모습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혼란이었다. 하지만, 프리마돈나의 영예를 움켜지겠다는 그녀의 욕망이 강해지면 니나의 흑조 연기는 마침내 성공하고 무대 위의 그녀는 모두의 갈채를 받는다. 그러나 그녀 역시 나귀 가죽을 쓴 백조의 운명과 다름이 없는 존재가 돼간다.
욕망의 그물에 갇힌 모든 인간은 저 마법의 나귀 가죽을 손에 쥔 자들이 아닌가?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