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좀체 지우기 어려운 정신적 충격을 가리키는 말로, 어린 시절 잘 모르고 당했거나 한 개인이 감당하기 막막한 전쟁 또는 지진 같은 거대한 사건에서 비롯되는 내면의 심리적 장애까지 그 내용은 다양하다. 이런 표현이 오늘날 사람들의 입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것은 그만큼 살아가는 게 힘들고 서로 상처주고 받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역사의 발전에 낙관적이었던 세대가 전쟁으로 인한 참담한 파괴를 겪거나, 굳게 믿었던 사랑이 배반당하면 인간은 정신적 외상의 늪에 빠져든다. 기습당하듯이 찾아온 경제적 곤경이나 그간 의지했던 인간관계의 파탄, 열심히 애를 써도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감의 상실 같은 일들 모두 우리의 인생 여정에 강한 충격을 가해온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날로 악해지고 약아진다. 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트라우마가 언제나 그런 결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유대계 미국인 작가 아이작 바세비스 싱어의 단편 가운데 ‘바보 김펠’이라는 작품이 있다. 대량 학살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들이 신은 사실 없는 게 아닌가 하는 혼란을 경험하게 된 이후의 글이다. 신의 부재 속에서 정의나 신뢰, 평화나 생명, 사랑과 약속 같은 것을 소중히 여기며 산다는 것은 도리어 어리석은 자가 되는 길처럼 보인다. 트라우마의 결과다.
김펠은 그 같은 상황에서도 여전히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갖는 인간 유형이다. 그런데 그것은 도리어 조롱 대상이 될 뿐이다. 동네 남자 모두의 소유였던 창녀 엘카를 처녀라고 속이고 김펠에게 시집보내는 마을 사람들, 악을 웃으며 축제처럼 벌이는 자들 앞에서 선이나 정의가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은 바보 같기만 하다.
그러나 바보 김펠은 알면서 속아주고 끝끝내 세상의 방식으로 세상에 그 악을 되갚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바보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점차 그가 성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끊임없이 인간을 믿고, 속수무책 당하고도 복수하지 않으며 절대적 선의 세계가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으리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바보 김펠.
그의 모습은 신뢰가 붕괴되면서 생겨난 트라우마 앞에서, 인간을 구할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깨우치는 모델이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영악해지기만을 바란다. 바보 김펠이 없는 세상은 이러다가 그야말로 바보가 되고 말 것이다.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