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을 역사가 기억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이해에 미국에서는 하바드 대학이 세워진다. 같은 해, 중원을 공략하던 만주지역의 여진족은 명을 추격하면서 마침내 후금에서 청으로 이름을 바꿔 새로운 제국을 건국한다. 중국사 전문가인 존 패어뱅크가 기록한 1636년에 대한 역사의 두 가지 기억이다.
이웃 일본의 경우에는 1592년, 명이 중심이 된 동아시아의 체제를 흔들기 위한 임진년 조선정벌 전쟁 퇴각 이후 에도 막부가 성립돼 새로운 정치체제를 가다듬어 나가고 있었다. 일본이 목표로 삼았던 동아시아 주도권 확보는 일단 소강상태에 들어선 셈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1636년, 조선은 병자호란으로 해서 인조는 지금의 송파구 근처 나루터였던 삼전도에서 청의 황제에게 머리를 땅바닥에 대고 군신의 예를 강요당한다. 이미 1627년 정묘호란 당시 청에 대한 경계가 있었지만 이번의 경우에는 파죽지세로 밀고 오는 청의 힘에 두 달 만에 백기를 들었다. 후퇴하던 명이 조선에 원병을 청하는 것을 알고 청이 이를 차단하면서 중원의 패권을 쥐는 전략이 관철된 결과였다.
신흥강국 후금과 쇠락해가는 명 사이에서 중립정책을 펼쳤던 광해군이 이에 반기를 들었던 세력에 의해 축출되고 인조반정이 일어난 지 13년만의 일이었다. 자신을 명과의 이른바 성리학적 의리와 그 역사적 운명의 계승자, 즉 작은 중국 ‘소중화(小中華)’로 여긴 세력들이 직면한 위기였다. 현실은 청의 지배로 귀결됐고, 이후 북벌을 내세우며 언젠가는 ‘소중화의 위신’을 복구하겠다는 의지가 조선 내부에서는 펼쳐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중화주의에 매몰된 채, 조선이 망할 때까지 동아시아의 질서변화에 대한 대응의 무능력과 연결되고 만 시초였다. 그래서 홍익한과 최명길로 대표되는 척화(斥和)와 주화(主和)의 대립은 사실상 여전히 중국과 오랑캐라는 식의 위계질서를 굳힌 ‘화이질서(華夷秩序)’의 틀 안에서 전개되는 논전이라는 한계에 갇힌다. 조선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고 이끌고 나가려는 사상적 의지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성장과 미국의 일정한 후퇴, 그 사이에 분단국으로 존재하고 있는 우리. 과연 어떤 시선으로 오늘의 역사를 읽으면서 미래를 위한 선로를 깔아야할 지, 지난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줄 준비를 이미 마쳤지 않았을까?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