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파리나 로마에 여행 중이 듯이 국내 백화점에서도 유럽 유명 브랜드의 쇼핑을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달부터 발효된 유럽연합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덕분이다. 무역·유통업계가 들썩이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협상을 이끌었던 외교통상부 청사에서는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축하 리셉션이 열려 샴페인이 터졌다. 유럽연합 시장의 문턱이 낮춰짐으로써 우리의 수출신장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이 열리고 보니 원래 기대했던 것과는 어딘지 어긋나는 느낌이다. 진작부터 관심이 쏠렸던 명품 분야가 하나의 사례다. 오히려 루이비통은 FTA 발효 1주일 전에 제품가격을 평균 4~5% 올렸다. 지난 2월에 이어 불과 4개월 만에 다시 제품가격을 조정한 것이다. 샤넬도 지난 2년 동안 서너 차례나 가격을 올렸다. FTA 시행으로 예상되는 인하폭만큼 미리 올린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유럽연합과의 FTA 체결로 우리가 3년 안에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를 제치고 세계 5위의 무역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지만 공연히 김칫국을 들이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상대방은 이미 제국주의 시절부터 세계 곳곳에 무역 식민지를 개척했던 노련한 장사꾼들이다. 루이비통이 미리 가격을 올린 것을 보면 역시 우리보다 한 수 위가 틀림없다. 협정문 번역의 오류를 고치느라 허둥대는 실력으로는 따라잡기가 어렵다.
일반적인 인식도 벌써 수입상품을 어떻게 싸게 소비할 것이냐 하는 먹자판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삼겹살과 포도주, 맥주, 치즈 등의 가격이 인하됨으로써 소비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당장은 생활물가 안정에 도움을 주겠지만 가뜩이나 어려워지는 살림살이에 소비심리만 자극하게 되어서는 곤란하다.
FTA가 하나의 기회임은 분명하지만 이번 경우는 지난 2004년의 칠레 FTA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상대방의 상품 자체가 흡입력을 지닌데다 시장 규모도 월등하다. 열 개를 얻고도 스무 개를 잃을 수가 있다. 지금부터 FTA 싸움은 소비자들의 현명한 소비에 달려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