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영어로 ‘차이나’라고 하며 ‘도자기’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실크로드를 통해 서구로 흘러들어간 중국의 산물 가운데 도자기의 높은 인기가 나라의 이름 자체를 산물의 명칭으로 만들어버린 결과다.
그런데 어찌해서 중국을 차이나라고 하는가? 그리스·로마 문명권에서는 ‘아(a)’ 또는 ‘이아(ia)’는 땅이나 나라를 의미한다. 아라비아는 아랍+이아, 아랍인들이 사는 땅, 인도를 가리키는 인디아는 인도 사람들의 나라가 된다.
China는 Chin+a가 된다. Chin은 진(秦), 그래서 ‘진 나라’, ‘진+아’인 셈이다. 코리아는 코리+아, 고려가 코리, 또는 쿠리로 발음되면서 만들어진 단어다.
그런데 중국이 언제나 차이나로 알려진 것은 아니다. 19세기 중반에 나온, 중세 동서교류사의 중요한 문건을 담은 헨리 율의 저작집 제목은 ‘카타이로 가는 길’로 돼 있다. ‘카타이(Cathay)’는 중국을 말한다. 이보다 600년 전에 나온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도 중국은 카타이로 표기된다. 키탄이라는 발음이 카타이로 변해 기록된 것이고 그 뜻은 거란이다. 거란족이 주도권을 잡았던 시절의 산물이다.
서기 431년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몰려 추방당한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이들은 동방으로 퍼져나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되고, 중국에서는 빛날 경(景)자를 쓰는 경교로 그 존재를 알린다. 우리 역사에도 이들이 남긴 돌 십자가 등의 흔적들이 있다는 논란이 있을 정도다.
이 네스토리아파의 경전이, 불교유적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돈황 천불동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존경’이라는 문헌으로 20세기 초 발견된다. 여기에 적힌 명태(明泰), 마거사(摩拒辭), 노가(盧伽), 유한(瑜罕) 그리고 다혜(多惠)가 누구를 가리키는 단어인지 혹 짐작이 가는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복음서 저자와 다윗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다.
동과 서는 서로 다른 언어와 문명을 가지고 만났으며, 그 과정에서 자기 식대로 상대를 번역하면서 배워나갔다. 모든 문명은 번역을 통해 자신을 풍부하게 만들어 나갔다. 이슬람 문명의 절정도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을 대대적으로 번역한 후였다. 이 나라는 번역의 가치를 학문으로 대접해주고 있지 않다. 이런 나라에서 문명의 창고는 초라해질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