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A냐 B냐’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 보통 우리는 A를 먼저 취하고 있다가 나중에 B라는 옵션이 들어오면서부터 머리와 마음에 혼란이 온다.
가령 A라는 일을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나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우연하게 접하게 된 B라는 일에 관심과 열정을 느껴 혹시 그게 천직이 아닐까 고민한다. 그렇다고 B를 취하려면 A를 버려야 하는데 그건 너무 아깝지 않을까? 혹은 A라는 남들 보기에도 꽤 괜찮은 연인과 멀쩡히 잘 사귀고 있었는데 B라는 상대가 ‘짠’ 하고 나타나서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전혀 내 취향도 아닌데 이러니 더더욱 미치겠다.
보통 이런 양자구도에 대해 우리는 기존의 A들은 늘 주로 정말 ‘괜찮은’ 것들이고, 새로운 B라는 대상은 늘 주로 ‘불순한 유혹’으로 규정하려 든다. 즉 우리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이성적이니 웬만하면 무모한 모험을 안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헌데 구관이 명관이거나 ‘잠시 마음이 떴을 뿐’이라며 새로 온 B를 애써 떨쳐내려는 행위는 과연 제정신 차리는 짓일까? 글쎄다. 때로는 객관적으로 괜찮은 것과 주관적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전혀 별개이고 나중에 끼어들었다고 해서 몹쓸 것만은 아니다. 그건 그것대로 진실된 하나의 삶의 방향성이자 감정일 테니.
특히나 사람들은 “그래 내가 B에 대해 느끼는 열정은 일시적인 도피나 착각에 불과해”라며 스스로 마음정리를 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여보지만 그렇게까지 일부러 정리해줘야 하는 감정이라면 그 감정은 제법 세다는 얘기다. 어쩌면 자꾸 B라는 가능성을 ‘내가 탐내서도, 빠져서도 안 될 그것’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사실 B라는 가능성이 나를 내칠까봐, 자신감이 없어서 보호기제가 작용한 것뿐이다.
결정해야 한다. 모험을 안 하고 억누르며 살지, 아니면 한 번 이 형언하기 힘든 감정과 열망의 끝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볼지. 내 생각엔 뒷맛이 깔끔한 건 차라리 후자의 경우같다. 감정을 억누르고 규정짓고 합리화하는 것이 가장 안 좋다./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