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뜨락으로 계절이 들어선다. 그 뜨겁던 태양은 이제 반쯤은 양보한 기색이고, 꽃들은 여름 내내 준비했던 옷으로 갈아입고 들판으로 나선다. 코스모스의 하늘거리는 자태는 누가 봐도 아름다운 여인이다. 기묘하게도, 아무리 바람과 함께 유혹적인 몽 짓을 한다 한들 여전히 단정하다.
치열하게 울어대던 매미소리도 어느새 그쳤고 이따금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자연의 시계 노릇을 하고 있다. 연두 빛으로 봄을 알리던 이파리는 짙은 녹색으로 몸을 휘감고 있지만 조만간 황색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그건 이승을 떠날 차비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할 일을 다 마치고 도달한 경지의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두 달이 가깝게 내렸던 비와 격류를 닮았던 홍수, 그리고 지천의 범람도 어느새 망각 속에 묻혔다. 지구가 태어나고 인류가 출몰한 이래 무수히 치러온 그 경련같은 몸부림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흙과 바람과 물과 산맥에 기록되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어느 날 또 다른 자연의 풍경이 되어 일상으로 존재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해보면, 온 우주가 수천, 수만의 화산처럼 폭발하고 우주의 파편이 이리 저리 흩날리면서 사라지기도 하고 서로 끌어 다니거나 밀어내기도 하면서 행성의 궤도와 거리를 만들어낸 그 엄청난 장관도 이젠 우리의 일상이 아닌가? 예상치 못한 격변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고 본래 변화만 존재할 뿐이다.
‘만물이 유전(流轉)한다’는 저 옛적 지중해 아나톨리아의 해변가 도시 밀레토스에서 철학자가 되어 살아간 헤라클레이토스는 그래서 상식을 말한 것 이상이 아니다. 단지 그에게 특이한 것은 더운 것은 차가운 것을 불러오고, 상승하는 것은 하강의 계기를 이미 그 안에 품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점에 있다.
그러니 그 어느 것도 영속하지 않으며, 변화란 현재의 모습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으로 가려는 끈질긴 속성을 가지고 있다. 다행이다. 인생이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 할테니. 격렬한 바다는 잠잠해질 것이며, 미동도 하지 않을 것 같아 보인 사막은 바람과 함께 모래산맥을 밤 사이에 움직인다.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더위도 가을 앞에서 식어가고, 이 가을도 다시 봄과 여름으로 가는 긴 여정의 한 토막이다.
가을의 문을 열고 들어선 정원에는 변화를 쓸쓸하다고 여기지 않는 내가 서 있다. 세월의 고개를 넘어가는 여정이 무척이나 기대가 된다는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