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대학생들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에는 캠퍼스 커플끼리 공개적으로 손을 못 잡고 다녔다. 이뿐만 아니라 같은 대학 안에서 한 해는 A군을 사귀었다가 이듬해에 B군을 사귀면 그 여학생은 다소 문란한 인상마저 주었다.
지금은 물론 그 정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대체로 한 상대에 대해 가급적 오래도록 의리를 지키고 책임을 다하는 것을 미덕으로 쳐준다. 비단 연인관계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친구관계나 직장 고용관계에도 해당되는 얘기다.
10여 년 가까이 사귄 연인임에도 막상 결혼준비에 이르자 돈과 집 문제를 두고 가치관의 갈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 학창시절부터 ‘써니’들처럼 한 그룹으로 뭉쳐 다니던 여자들이 성인이 되면서 말이 안 통하기 시작할 때, 오랜 기간 애사심을 가지고 다녔지만 윗선들이 대거 물갈이가 되면서 점점 자신의 입지가 좁아져 갈 때, 이 오랜 관계들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종지부를 찍어 말아? 의리를 저버리고 배신을 해야 한다는 죄책감도 있지만 오랜 기간 함께 해왔다는 것은 결국 습관이라 아주 고통스럽지 않을 바에야 그 오랜 습관을 스스로 벗어 던지는 행동은 꽤 힘들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아무리 그래도 그동안 이런저런 일을 함께 겪었는데 다시 심기일전해 잘 해볼까.”
문제는 그 오랜 세월의 빛 바랜 추억으로 잠시 마음을 다스려 보건만 이내 그 얼굴이나 상황을 다시 마주하면 속절없이 시들시들 지쳐버린다는 것이다. 관계를 맺은 기간이 얼마나 길었든 간에 그 상대가 내게 주는 현재의 고통이 크다면 그건 좀 문제 있다.
관계는 늘 ‘현재진행형’이다. 상대와 내가 현재 좋은 관계인 것이 지금 가장 중요할 터, 오랜 세월은 현재의 좋은 순간들이 무수히 많은 점들로 찍혀 한 선을 자연스레 만들어냈을 때라야 의미가 있다. ‘이걸 어떻게 이제 와서 끊어’라고 용기를 못 내도, 듬성듬성 헐겁게 짜인 실은 아무리 길어도 손 대면 톡 하고 언젠가는 끊어질 실이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