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강화학파의 거두로 알려진 정제두의 묘를 둘러본 뒤, 광성보로 오른다. 이윽고 초지진에 이르면 이 땅이 겪었던 전란과 국가의 위기가 파라노마처럼 떠오른다. 고려가 몽골의 군대와 맞서 힘겹게 자신을 지켜내려 했던 13세기를 비롯해서,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일본이 연달아 치고 들어온 18세기 중후반의 역사적 장면들이 머릿속을 채운다.
정제두는 당대의 주류인 주자학에 맞서 양명학의 기치를 든다. 공리공론에 빠져 있는 조선 유학에 일침을 가하면서 지식과 실천이 하나가 되는 길을 뚫어야 한다고 외쳤지만, 그는 이단아로 몰릴 뿐이었다. 18세기 중반이었다. 조선은 내부에서 자신을 개혁할 수 있는 동력을 하나하나 잃어가고 있었고, 외부의 적이 기습해오자 위란의 지경에 처하게 된다. 역사의 방향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채 19세기를 맞이한 조선의 운명은 그렇게 기울어져 갔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 그리고 1875년 운양호 사건, 1876년 강화도 조약의 시기는 중세와 근대의 갈림길에 서 있는 조선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강화도는 그런 역사를 증언하는 현장이지만, 그만큼의 비중으로 다가오고 있지 못하다. 강화도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깨우침이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가 찬탈해간 외규장각 도서 일부가 돌아오는 날, 그건 하나의 행사로 그치고 그 의미는 깊게 파헤쳐 지지 못했다.
1782년 정조가 세운 강화도의 외규장각은 조선의 지적 수준을 증언하는 동아시아 문명의 보고였다. 이걸 파괴한 당시 프랑스는 혁명의 나라로 자신을 내세웠는지는 모르나, 그 행동을 보면 야만의 국가 아닌가? 1853년 일본 해안에 나타났던 미국의 페리호는 이후 터진 남북전쟁으로 더는 일본 막부체제에 공세를 취하지 못한다. 그러나 1871년 미국은 조선을 침략한다. 신미양요다.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식으로 전쟁의 주체를 중심으로 표현하자면 조-미 전쟁이었던 셈이다. 미국과의 격전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우리의 근대사에서 그리 부각되지 못한다. 미국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기 어렵게 만들었던 역사가 있었던 탓이다. 이런 역사관은 이 시대의 주자학이며, 그걸 비판하는 역사관은 정제두의 강화학파인 셈이다. 강화학파는 여전히 이단인가?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