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에 대해 내가 받는 가장 난감한 질문은 바로 “어떻게 하면 연애를 할 수가 있나요?”다. 질문자는 늘 천진하고도 진지한 표정이다. 말이야 자신을 매력적으로 가꾸고 사람들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만나서 자신을 효과적으로 어필하라고 누가 못할까.
저 질문이 그토록 당혹스럽고 어려운 것은 연애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다름 아닌 ‘내가 누군가를 좋아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참으로 본인 외엔 그 누구도, 어떤 방식으로도, 도와줄 수가 없다. 심지어 당사자도 어떤 의미에선 억지로 누군가를 좋아하려고 물리적으로 ‘노력’할 수가 없다. 그건 그냥 자연적이고 본능적이고 불가항력인 무엇이다.
헌데 본능과 열정이 과하게 넘쳐나서 그것들을 처리하기 힘들었던 젊음의 모습은 점점 사라져가고 우리 안에 본능과 열정은 점점 자체적으로 잘 우러나지도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혼란스럽다. 분명히 영화나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봐온 바에 의하면 연애라는 건 이 사람 없으면 안 될 것 같고, 죽을 것 같아야 하는데 막상 나는 그 사람 없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쿨’하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이 든다는 것은 진짜 연애가 아닌 거죠?” 사람들은 ‘내가 그 사람을 그만큼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나는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고 그래서 내가 다른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면 분명히 더 열정적으로 푹 빠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진다. 로맨스는 죽지 않았다며.
하지만 이것은 나한테 본래 열정이 없는 것을 남 탓하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 열정적인 연애를 해왔던 사람은 늘 주로 열정적이었고, 담백한(?) 상대를 골라놓고도 그들 상대로 열정적일 수가 있었다.
반면 담백한 사람들은 열정적인 상대를 앞에 두고도 늘 주로 담백 그 이상의 것을 줄 수가 없었다. 선천적인 기질은 어쩔 수가 없다. 저마다 채움을 필요로 하는 기준치가 다른 것 뿐이다. 열정의 포용범위가 저마다 다 다른 걸? 차라리 내 체온의 상한선을 분명히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차라리 상대를 구제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