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의 한 헌책방 거리로 들어서면 고서가 잔뜩 쌓인 분위기에 금세 매료된다.
뉴욕 브로드웨이 여기저기에 있는 헌책방도 삐거덕거리는 계단 옆으로 이어지는 벽까지 차지한 책들로 마치 흑백사진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일본 도쿄의 헌책방들은 세월의 오랜 흔적이 자부심처럼 깊게 배어 있다.
동판 삽화가 담겨진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 초기 판본이라든가 일찍이 스탈린 체제를 비판했던 영국 사회주의자 토니 클리프의 책, 청일전쟁 당시 일본 외교문서가 책으로 엮어진 것을 발견하는 날에는 마치 횡재를 한 듯하다. 사실은 중고서적을 다루는 책방이야말로 그 나라 문화수준의 오랜 역량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청계천 공사가 시작되면서 그곳에 있던 헌책방들은 멸종되고 말았다. 인사동 쪽이나 서울 시내 이곳저곳에 뜨문뜨문 있는 중고서점들도 예전의 활기는 보기 힘들다. 책 자체에 대한 관심이 소멸하고 있는 시대에 헌 책의 운명은 더군다나 암담하다.
어느 날, 동교동 근처 헌책방에 우연히 들렀다가 고대 총장을 지냈던 고(故) 김준엽 선생의 ‘중국 최근세사’를 구할 수 있었다. 1971년도 판이니 벌써 40년 전의 책이다. 중국에 대한 세간의 주목이 그때에 비하면 엄청나게 달라진 지금은 중국 관련 서적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니 이 책은 이제 너무 낡은 책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지만 책의 내용은 놀랍기만 하다.
대학시절 읽었던 이 책을 다시 구해 읽고 있으니 중국을 몸소 체험하고 일어, 영어, 중국어에 능통했던 김준엽 선생의 그 탁월한 학문적 성취가 새삼스러웠다. 요즈음 중국관련 서적에서는 볼 수 없는 세계사 전체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중국의 내면을 깊게 응시하는 그 안목이 정신을 번뜩 차리게 한다. 이 책은 품절이라 새 책방에서 구할 수 없다.
영국 헤이온 와이는 인구 1500명에 헌책방이 30개다. 리처드 부스는 이곳을 세계적으로 유명한 헌책방 마을로 만든 주인공이다. 그는 “좋은 책들이 이미 나온 것이 많은데 그건 왜 거들떠보지 않는가?”라고 일갈한다. 마을이 그렇게 해서 살고, 오래 전 폐기될 뻔했던 책들이 생명을 얻었다.
서울은 헤이온 와이를 갖지 못하는가? 서울이 뉴욕, 런던, 도쿄 못지않게 문명의 도시가 되려면, 헌책방 거리 또는 헌책방 마을 하나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