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명청(明淸) 교체기에 중국 대륙의 변화를 일단 지켜보기로 한다. 기존의 중화체제에 중심이던 명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에, 청과 맞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그렇다고 명과 계속 종주국의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도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광해군의 대외관계는 명을 받드는 중화론자들의 반격을 받고 결국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일대 변화를 겪는다.
하지만 실력이 되어 있지 않은 당시 조선은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으로 무릎을 꿇고 청의 신하나라로 예를 다하기로 맹세를 하게 된다. 그때까지 후금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던 청은 1644년 중국을 통일하고 동아시아 전체의 제국으로 우뚝 선다. 거대한 중화제국의 등장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인식은 달랐다. 청은 중화제국이 아니라 만주족이 지배하는 야만족의 국가였고 이제 명이 사라진 현실에서 조선만이 중국의 중화체제를 계승하는 적통을 가졌다는 식의 생각을 하고 소중화론을 내면화한다. 이것이 인조 이후 “북벌론”의 기초였고, 조선의 사상은 송대의 주자학이 대세를 이룬다. 12세기, 거란족이 중심이 된 요가 송을 압박하면서 남으로 쫓겨 내려간 남송의 사상이 당시 조선의 현실과 부합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조선의 자존심을 지켜내려 했지만 그건 동아시아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앗아가고 만다. 조선이 겉으로는 굴복하면서도 속으로는 깔보고 있던 청은 제국으로 성장하고 문물을 발전시키면서 중국의 역사를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이런 청의 현실을 제대로 봐야한다고 했던 것이 박지원등의 북학파(北學派)와 새로운 국가체제를 만들겠다고 진력을 다했던 성호 이익을 뿌리로 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의식을 가진 이들이었다.
이들 두 계보는 이후 다산 정약용의 학문세계로 집대성이 되어 실학으로 나타난다. 이때의 실학은 단지 실질적인 근거를 둔 학문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조선을 고루하게 낙오시키고 있던 당시의 사상 전체와의 역사적 대결을 의미한다. 이런 조선의 사상적 격투는 오늘의 역사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한다.
역사를 망각하는 나라에서 내일을 위한 지침을 발굴하는 작업은 뿌리가 깊지 못하다. 우리 조상들의 저 절절한 육성을 잊고 사는 오늘은 아무래도 사상의 빈곤을 자초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