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
도통 지도 볼 생각을 않는 편이다. 그저 감에 의존하는 습관이다. 그런데 그 감이란 것도 실은 어느 순간 보았을 지도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닌가. 경남 통영 강의를 위해 부산 사상터미널에서 시작한 기나긴 여정이 하루 해를 넘긴 뒤 경기도 광명역에 도착해서야 겨우 막을 내릴 수 있었고, 속으론 계속 이런 말을 되뇌었다. ‘담부턴 지도 한 번 보고 움직여야겠어.’
기차 안에서 미셸 우엘벡의 ‘지도와 영토’를 읽는 시간은 내내 몽롱함과 뒤척임의 연속이었다. 제드 마르탱이라는 예술가의 일대기이자 21세기 유럽문화의 현재성을 슬프게 혹은 경멸적으로 눙치고 있는 소설은 딴엔 이지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비판의 칼춤을 휘두르고 있다.
엉뚱한 발상이지만 ‘지도와 영토’는 어찌 보면 프랑스판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면서 또 어찌 보면 장폴 뒤부아의 ‘프랑스적인 삶’의 확장형 혹은 완성형으로 읽히기도 한다. 예술과 현실,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넘나들고 있어서다.
아무려나 “진정한 예술이란, 모든 사회는 저항의 목소리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미셸 우엘벡의 진술에 동의를 표하면서.
#마흔
지인의 말이 떠오른다. 마흔은 비로소 자기 이름으로 불리는 나이라고. 마흔이 되기 전까진 누구의 아들로 누구의 동생으로 불렸는데 마흔이 되고 나니까 그제사 동네어른들이 자기 이름을 부르더라는 거다.
‘사람풍경’의 서문에서였던가. 작가 김형경은 ‘마흔이 되어서도 내 마음이 이럴 줄 몰랐다’고 고백한다.
길을 걷다 멈춰 서서 갑자기 삶이란 게 궁금해져서 고민하다가 끝내 눈물을 흘리게 되는 때, 그때가 바로 마흔이라고 고백하던 시인의 얼굴도 떠오른다.
출판계에선 꾸준히 마흔 살 마케팅이 이어지고 있다. 한때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이 꾸준히 나가는가 싶더니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점에선 마흔이라는 제목을 단 책들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온다.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마흔 살의 철학’ ‘마흔 살의 책읽기’ 등등.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나온 시기에 새삼 맞닥뜨리는 삶의 덧없음과 잔인함에 치를 떨게 되는 나이. 그 마음을 치유하려는 듯 경쟁적으로 출간되는 책들을 일별하면서 문득 사십대 후반기의 겨울날이 쓸쓸하다.
/‘유쾌한 420자 인문학’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