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라는 뜻을 가진 한자는 '行(행)'이다. 이 글자는 사방으로 오갈 수 있는 길이 뚫려 있는 십자로를 본 뜬 것이다. 그 원형이 기원전 1300년에 해당하는 은나라 후반기에 사용된 갑골문에 나올 정도니 사람과 가축, 수레가 분주하게 오가는 고대 성읍(城邑)국가의 도시 풍경이 떠오르는 듯 하다.
그런데 고대 중국에서는 이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수레바퀴가 일정하지 않아 곤란을 겪었다. 너무 크고 무거운 수레는 바퀴자국이 깊게 남아 다른 수레가 다니기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3세기, 화폐, 도량형과 함께 바로 이 수레바퀴의 크기를 통일 시킨 것이 진시황이었다.
길에 대한 권력은 실로 가장 막강한 권력이다. 한 인간이 살아가는 길에 대해 누군가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권력자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국가가 이걸 장악하면 제국이 건설된다. 진의 중국 통일도 그렇고, 고대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은 그런 역사를 웅변해준다.
로마가 길이란 길은 모두 쥐고 있을 때 제국의 한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의 어느 촌에서 등장한 예수라는 청년은 "내가 곧 길이다"라고 외쳤다. 당대의 현실에서 위험천만한 발언이었다. 이 말은 오늘날 종교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예수에 대한 유일적 신앙의 선포가 아니라, 현실의 로마가 지향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의 제시와 관련이 있다. 저런 걸 길이라고 여기지 말고, 예수가 사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삶과 그 내면에서 길을 뚫으라는 깨우침이었다.
진시황이 책을 불태우고 선비를 파묻은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한 까닭도 황제인 자신이 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일깨우려던 이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이로써 각기 제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던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현실에서는 십자로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본래 사방으로 뚫려 있던 인간정신의 길은 막히고 만 것이었다.
'길'은 한자로 '道(도)'다. 간다는 行(행)과 머리 수(首)가 하나가 된 글자다. 머리로 상징된 사람이 길을 가는 모습을 그려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그저 머리를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생각하고 성찰하는 자가 가는 길을 보여준다. 세상에는 권력이 뚫어내는 길이 있는가 하면, 생각하는 이가 새로 뚫어내는 길이 있다. 지금 우리는 어느 길을 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