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이 나라에선 '진정성'이 매우 중요한 코드로 자리잡은 듯 하다. '진실한 마음이 담긴 것'을 의미하니 그간 얼마나 이 사회가 부정부패의 사기꾼들한테 당해왔는지를 거꾸로 알 수가 있다. 특히나 대선을 앞둔 이 시점에선 '진정성'이라는 가치는 더욱 과대평가될 기미다.
우리는 진정성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을 공정한 원칙과 상식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일이자 처음 한 약속을 나중에 확실히 지키는 '결과'적인 것이라고 보는데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진정성'은 흔히 '이미지들'이다. 비장미 넘치는 언어, 사죄나 자숙의 겸손한 몸짓, 열망의 눈빛과 인간미 넘치는 눈물, 따위. 그러나 외형적인 디테일이 많아질 수록 진정성이라는 단어쓰임은 점차 얄팍해질 뿐이고 스스로가 어떤 정의롭고 감동적인 이미지를 주고 있음을 아는 게 겉으로도 드러날 경우, 상황은 더욱 구려진다.
새누리당 이준석 비상대책위원이 '목 잘린 만화' 사건 이후 문재인 고문에게 직접 찾아가 사과한 것을 두고 '진정성이 없다'고 비판을 하는 것은 그 것을 '빤한 언론플레이'라고 보는 시각 때문인데 이 위원의 사과는 진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진심과 진심 아님이 반반일 수도 있다. 혹은 시시각각 마음이 '그때 그때 달라요'일 수도 있다. 그게 사람 마음의 유일한 진실일 수도 있다.
겉으로 표명하는 확고함과는 달리 사람의 마음은 대개가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당사자의 속마음을 알 길 없는 남들이 진실이다 아니다 왈가왈부하는 건 사실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다만 적어도 진정성은 대외적인 제스처가 아닌 '자신과의 내향적인 소통' 언저리 어딘가에 위치한다. 그 혼잣말들은 어지럽게 맴돌다가 어디서부턴가 '작용'하고 '체화'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이 지나서야 그 '결과'적인 것을 봄으로서 당시의 '진성성'을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문재인 고문은 이 위원을 감싸고자 '누구나 젊은 시절 실수와 실패를 겪으며 성장한다'는 낙관론을 말하지만 그렇게 치면 지금 이 나라가 이토록 '진정성' 타령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어야 한다. 글/임경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