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운동을 한다니까요."
유행어인가 싶었다. 최근 만난 기업 홍보담당자 3명에게 똑같은 말을 들었으니. 업무상 저녁 술 모임이 많은 이들은 만취하고서도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한단다. 그들은 강도 높은 업무와 회식을 견뎌낼 용도로 몸을 만들고 있었다.
직장인뿐이랴. 학원수업에 시달리는 초등학생까지 "피곤하다"고 호소하는, 그야말로 '피로 사회'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의 피로를 먹고 사는 '피로산업 제품'들이 요즘 잘 팔린다.
카페인 음료가 대표적이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밤, 서울 홍대 인근 클럽에서 '예거 밤(bomb·폭탄)'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직장인들이다. 독일 술 예거마이스터에 카페인 음료를 섞은 폭탄주인데 마시면 밤새 지치지 않고 놀 수 있다고 해 금요일이면 탈진 지경인 회사원들에게 인기다.
카페인 음료는 중·고등학생들도 들이킨다. 이온음료 등을 섞은 형태로 '붕붕드링크'라 불리는데 시험 잘 보게 해주는 음료로 통한다.
피로는 원래 마음과 몸을 푹 쉬면서 푸는 게 정석일 텐데, 그럴 여유와 시간이 없어 음료에 기대는 현실은 위태롭기만 하다.
사람들이 피곤해지는 동안 에너지 음료업체들은 짭짤한 수익을 챙기고 있다. '레드불' '핫식스' 매출은 불황 속에서도 지난해보다 4~5배 뛰었다. 파리바게뜨도 에너지음료 출시를 선언했다. 이들 업체들은 게임 행사장 등에서 시음 행사를 하는 등 전략적으로 20~30대를 노린다.
건강기능식품 신제품이 쏟아지고 또 잘 팔린다는 기업들의 자료들도 한편으론 씁쓸하다. 스파·마사지 업체는 물론 여행업계도 '힐링' 상품으로 호황을 누린다니 피로산업이 전방위로 퍼져나가는 모습이다.
무서운 것은 카페인 음료나 힐링 제품으로는 해결 안 되는 마음의 병이다. 20대 후반의 김 모씨는 마른 체형의 멋쟁이였는데, 최근 식이장애를 겪고 있다고 털어놨다. 살이 찔까봐 한 번에 폭식한 뒤 토해내는 걸 반복하며 우울해하고 있었다.
이 같은 피로 현상은 전염병처럼 번지는 중이다.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의 한병철 교수는 자신의 책 '피로사회'에서 우울증과 자살, 성격장애 등을 이 시대가 낳은 질병이라고 진단한다. 우리가 숱하게 들어 온 '하면 된다'는 긍정의 과잉이 피로사회를 만들고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는 지적이다.
오늘도 많은 이들이 '피로는 저에게 맡기세요'라고 유혹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맞닥뜨리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중요한 건 자신의 현재를 인식하고 근본적인 해결법을 찾아나가는 일일 것이다. 개인의 힘으로는 홀가분한 정답을 기대하긴 어렵겠지만, 조그만 시작이 큰 깨달음을 일굴지 모를 일이다. /전효순(생활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