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힐 이야기
집 가(家)는 지붕 아래 돼지가 있는 모양새를 본 따 그린 글자다. 한 집안이 그렇게 형성되었다는 "인류학적 기원"이 설명되는 문자다. 돼지를 길러 살아간 삶을 보여준다. "뒤쫓아 가다"라는 뜻의 축(逐)이 멧돼지를 쫓아가는 모양을 담은 글자라는 점에서도 인간과 돼지의 관계는 꽤 오래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돼지만이 아니라, 개(犬)나 말(馬), 호랑이(虎) 또는 물고기(漁)의 고대 문자가 모두 몸을 위로 하여 서 있다는 점이다. 글자를 대나무를 잘게 쪼개 엮은 죽간(竹簡)에 세로로 내려 써야 했기 때문이다. 책(冊)이라는 한자의 형상이 바로 이 죽간이 옆으로 길게 이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죽간으로 만들어진 책들이 종이책의 모태였고, 그러면서 한자의 뜻도 여러 갈래로 진화한다. 가령 본래는 도마뱀을 그린 역(易)자는 변화를 의미하는 문자가 되었다. 천하의 운행과 그 변화를 읽어낸다는 주역(周易)의 "역"이 바로 이 글자다.
이렇게 한자의 고대형상을 알고 그 뜻을 새롭게 새길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갑골문(胛骨文)의 발견과 그에 따른 갑골학의 발전이 결정적이었다. 신화나 전설의 시대로 생각했던 기원전 14세기 상(商)왕조의 유적이 1899년, 거북이의 등껍데기와 소의 뼈에 새겨진 글자로 대거 발굴이 되면서 중국 한자의 출발과 의미에 대한 해석은 깊어진다.
한자의 기원은 기원전 2500년의 인물로 전해지는 창힐이다. 그는 눈동자가 넷이라는 전설을 가졌고,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으로 활약했다고 알려져 있다. 해(日)와 달(月), 사람(人)을 비롯한 한자를 만들어 황제에게 바치니 황제가 감격하여 그에게 "창"이라는 성을 내려준다. 여기서 "창(倉)"자는 사람(人) 아래 임금(君)이 있는 형상으로 그 뜻은 "임금 위에 백성이 있고, 백성 아래 임금이 있다"는 것이다.
무릇 권력자는 자신의 가문이 아니라 모든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의 사상은 이때 이미 그 싹을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기 가문의 명예와 출세만 노리는 자들이 득실거린다. "천하위가(天下爲家)"이다. 역(易)자가 처음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처럼, "천하위가"에서의 "가"는 돼지에게는 미안하나, 돼지처럼 욕심 많고 더러운 집안이라는 뜻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창힐의 뜻이 새롭게 성찰되었으면 하는 계절이다. /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