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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봉의 도시산책] 소공동 차이나타운은 왜 사라졌을까?

화교가 가장 먼저 진출한 인천을 시작으로 서울 연희동에도 다시금 차이나타운 붐이 일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차이나타운이 있는 곳이 몇 되지 않을 뿐더러, 설령 있다고 해도 타국의 그것에 비해서는 소규모에 불과하다.

한반도에 화교가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세기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2년 임오군란 진압을 이유로 파견된 청나라 군대와 함께 온 상인들이 조선에 눌러 앉으면서 화교라 불린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였던 1931년 중국 길림성에서 일어난 '만보산 사건'은 국내 화교 사회에 엄청난 파국을 몰고왔다. 만주 침략을 획책하던 일제가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를 갈라 놓기 위해 벌인 술수에 걸려든 나머지, 평양이나 서울 등지에 살고 있던 화교들에게 조선인들의 분노가 집중됐고 결국 백수십 명에 달하는 화교들이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친 것이다.

화교들의 수난은 해방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이 지금의 서울시청앞 플라자호텔 언저리에 있던 차이나타운을 밀어버리고자 한 것이다. 애당초 낙후한 차이나타운을 재개발해 화교회관을 지어주겠다며 접근했지만 개발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결국 경제난에 허덕이던 화교들이 그 땅을 대기업에 팔아버리면서 지금의 플라자호텔이 들어서고 만 것이다. 화폐개혁을 통해 화교들의 장롱속 재산을 휴지로 만들어버리거나 부식을 권장한다며 중국음식점에서는 쌀이 들어간 음식을 팔지 못하게 하는 등의 압박도 앞서거니 뒤서거니했다. 화교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데, 지난 2010년 국적법 개정 당시 화교에게 복수국적을 부여하는 등의 몇 가지 대책이 논의됐지만 결국엔 무산되고 만 것이 한 예다.

최근 들어 지역활성화 등 경제적인 이유로 인위적으로라도 차이나타운을 만들자는 주장들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서, 필요 없을 땐 버리고 필요할 때만 취하는 대한민국의 근시안적인 태도에 대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소수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 나라의 국격을 가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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