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생기고 아름다운 남녀 스타의 질적 도약은 자신의 외모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희화화할 때 제대로 이뤄진다. 가끔씩 한심한 얼간이로 변신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 조지 클루니, 캐머런 디아즈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장동건도 어느덧 그 수준에 가까워진 듯하다. 40대로 접어들면서 젊었을 적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바람둥이 캐릭터에 자주 눈을 돌리고 있으니 말이다. 11일 개봉될 '위험한 관계'는 자타 공인 '국가대표' 미남 배우가 어떤 식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열강들의 다툼으로 한 치앞을 내다볼 수 없는 1930년대의 중국 상하이, 상류사회의 악명높은 난봉꾼 셰이판(장동건)은 관능적인 여성 사업가 모지웨이(장백지)로부터 "정략 결혼을 앞둔 소녀와 먼저 하룻밤을 보내면 나를 사랑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내용의 은밀한 거래를 제안 받는다.
그러나 셰이판은 공략하기 쉬운 소녀 대신 남편이 죽고 자선 사업에만 전념하고 있는 정숙한 여인 두펀위(장쯔이)를 새로운 목표물로 삼겠다고 선언한다.
이 작품의 가장 재미있는 볼 거리는 '친구' 이후 그동안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장동건의 숨겨진 '얼굴 근육'이다. 스스로 유일한(?) 약점이라 여겨왔던 이마의 주름마저도 마음껏 구겨가며 비열한 사내로의 변신을 서슴치 않는다.
장백지와 장쯔이의 불꽃 튀는 연기 대결 역시 백미다. '파이란'의 청순 가련한 여인으로 오랫동안 익숙했던 장백지는 희대의 팜므 파탈 역을 맡아 '뜨거운 냉기'를 내뿜고, 반대로 강인한 캐릭터 전문이었던 장쯔이는 외강내유 형의 인물을 호연한다.
연출자인 허진호 감독은 전작 '호우시절'에 이어 또 한 번 숨소리만으로도 객석의 흥분 지수를 끌어올린다. 이미 국내외에서 수 차례 영화화됐던 18세기 프랑스의 원작 소설을 꼼꼼한 연출력으로 다시 새롭게 변주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느슨해지는 후반부다. 힘을 줘야 할 대목에서 정작 다리가 풀리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18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