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가 있던 곳은 중국 상하이도 충칭도 아니다. 바로 서울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과 서대문역 사이의 언덕 위에 있는 강북삼성병원 자리에 있었다. 최근까지 강북삼성병원의 현관 구실을 하고 있던 석조건물 '경교장'이 바로 그곳이다.
애당초 갑신정변 이전까지 조선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이름을 따 '죽첨장'이라 불렸던 이 건물은, 일제 때 금광을 개발해 '조선의 황금귀신'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부를 축적한 최창학의 소유였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해방은 죽첨장에 새로운 운명을 부여한다. 친일부역에 열심이던 최창학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이 건물을 오랜 방랑 끝에 환국한 임시정부 측에 내놓으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사용하게 된 것이다.
경교장에 여장을 푼 백범 김구는 먼저 건물 이름을 왜색이 짙은 죽첨장에서 경교장으로 바꾸었다. 그리고는 어수선한 해방정국에서 조선인의 권익을 위한 활동들을 펼쳐나간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알려지자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펴기로 결정하는 등 경교장은 '반탁 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그리고 '통일 운동'의 중심지로서 기능했다. 나아가 남북이 분단될 가능성이 커지자 "통일만이 우리가 살 길이기에 통일을 위해서는 그것이 공산주의자와의 협상이라고 해도 마다해서는 안 된다"며 북행을 결의하는 등, 통일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9년 백범이 서거하면서 경교장의 운명도 파란을 겪어야 했다. 최창학이 되가져간 이후 타이완대사관과 미군 특수부대 사령부, 그리고 베트남대사관저 등으로 이용되면서 원래 모습을 서서히 잃어갔다. 이윽고 1968년에 강북삼성병원의 전신인 고려병원에 인수되고부터는 건물 내부가 완전히 뒤바뀌기 시작하고 말았는데, 최근까지도 응급실과 약국, 의사휴게실 등으로 쓰인 탓에 외벽만 그대로일 뿐 내부는 원래의 모습을 상당 부분 잃은 상태였다.
그랬던 경교장의 운명이 새로운 출발대 앞에 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구가 암살당한 2층 집무실 정도만 원형 복원돼 관람객을 맞았는데 3년 전부터 전면 복원작업을 벌인 끝에 지난 주, 드디어 일반에 공개됐기 때문이다. 김구가 안두희의 총탄에 암살당한 지 64년만의 일이다.
/권기봉 '다시, 서울을 걷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