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꽁꽁 가두어 두었던 한파였나 보다. 병마개가 열리는 순간 빠져나온 '지니'처럼, 겨울의 입김은 호리병 안으로 되돌아가게 할 수 없는 냉기를 뿜어낸다. 기세가 자못 강렬해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리면 금세 눈발이 날릴 듯한 기색이다. 맑았던 하늘이 짙은 회색을 머금자 마을의 불빛이 하나 둘 반짝이기 시작한다.
시간은 계절의 온도에 따라 녹기도 하고 얼어붙기도 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 시간의 속도는 때에 따라 달라지지 않으며, 자신이 다녀갔다는 자국을 남긴 채 이내 떠난다. 그 예정된 결별에서 미련이나 아쉬움은 늘 우리 편에서 만이다. 스스로의 궤도에 이토록 지치지 않고 냉정할 정도로 성실한 존재는 우주를 온통 뒤져봐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간은 우리보다 한 발 앞서서 달리거나 뒤늦게 도착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아직'과 '드디어' 사이의 거리는 사람에 따라 다르기에 그런 착시가 생겨나기 마련이지만, 바라는 바가 이뤄지는 찰나는 언제나 더디고 지나간 세월은 아무리 빠르게 뒤쫓아가도 다시 잡을 수 없다. 열성을 다해 구애해도 좀체 속을 보여주지 않는, 애태우게 하는 연인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힘겹게 고개를 넘고 나면 목표가 보일 지에 대한 불안감, 망망한 벌판에 홀로 서 있다는 두려움, 늪으로 빠져드는 듯한 위기, 또는 발밑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긴장을 겪는다. 이 모든 것은 다 명료하게 포착할 수 없는 시간의 정체에서 비롯된다. 시간을 앞지를 수 있다면 보일 내일이, 우리에게는 무엇으로도 미리 열 수 없는 철문이다. 열쇠는 단 하나, '기다림'이다.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내게 찾아와주었던 시간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나를 떠난 시간들이 남긴 자취를 깊이 어루만져보는 마음을 키우는 연습을 쌓아가는 거다. 그러면 다시 나를 찾아와줄 새로운 시간에 대한 자세가 저절로 만들어져나간다. 아직 닥치지 않은 내일에 대해 상상력이 가세한 염려가 지나쳐 초조해지거나 또는 지나간 일에 대한 피곤한 후회로 영혼이 마모되지는 않을 것이다.
날카로운 바람이 우리를 습격하고 우울한 날들이 회색 하늘처럼 지붕을 덮을지라도, 우리의 삶에 따뜻한 등불 하나씩 켜져 나가는 즐거움은 그렇게 해서 태어난다. 저무는 것은 시간의 그림자일 뿐이며, 결국 시간은 우리의 존재 안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