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골목 사이 저편에는 성인(聖人)들의 조각이 정밀하게 배치된 성당의 지붕이 홀연 나타나고, 거리에는 체리 와인을 팔거나 레스토랑임을 알리는 작은 간판들이 예쁜 명찰처럼 달려 있다. 완벽하게 보존된 중세의 유적이 현대와 공생하면서 새로운 미학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의 대학촌 살라망카에 그토록 많은 이들이 몰려드는 까닭이다.
사실 유럽의 오래된 도시에서는 보기 드물지 않은 풍경이다. 그런데 살라망카가 특히 주목되는 까닭은 여기가 중세 유럽의 지식을 대표하는 산실이었고, 지금도 그 시절의 지적 분위기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순례자들을 위한 수도원은 공공도서관으로 바뀌었다. 그 안에 들어서면 책을 존중하는 시대의 한 복판에 와 있다는 황홀한 환각에 사로잡힌다.
흔히 서양의 중세는 '암흑'으로 표현되고, 철저하게 허물어져야 하는 역사의 장애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는 모든 것들이 고단하고 억압되고 출구가 없는 막막한 삶처럼 존재하는 줄로들 알고 있기조차하다. 물론 근대 이전의 야만은 결국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역사학자 요한 하우징어가 그의 저작 '중세의 가을'에서 말했듯이, 중세란 우리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의 인문학적 교양과 문화적 깊이를 쌓아온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익고 익어 숙성되었을 때, 르네상스를 거친 유럽은 근대라는 새로운 시간 속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6세기에 시작됐던 한 시대는 천년의 무게를 만들어내고는 마침내 저물었지만, 그 열매는 세월이 흐른 만큼의 진액을 지금도 여전히 뿜어내고 있다.
회화사를 봐도 그렇다. 중세의 궁정미술과 성당의 권위 없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 없고, 이후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엘 그레코 없이 벨라스케스가 태어나지 못하며, 벨라스케스 없이 고야가 어디 있겠으며 더더군다나 피카소는 황량한 들판에서 태어난 천재가 아니다.
우리의 중세는 현대도시 서울에서 자취를 감췄다. 조선의 역사가 만들어낸 거리와 터는 토벌되다시피 했다. 중세의 깊이를 복원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가령 경복궁과 삼청동 한옥마을이 있는 일대에 조선시대 서고(書庫)처럼 전통가옥으로 된 도서관 하나 있다면, 수도 서울의 역사와 문화의 품격은 사뭇 높아지지 않겠는가? 이걸 상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이 나라의 혼이 근본에서부터 달라질 것이다.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