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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봉의 도시산책] <70> 장충단을 비집고 들어선 박문사, 그리고…



서울 장충동에 있는 신라호텔 정문(사진)은 여느 호텔의 그것들과는 사뭇 다른 모양새다.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하나인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을 쏙 빼닮았다.

현재 신라호텔이 들어서 있는 남산 자락의 이름이 '춘무산'으로 바뀌고 거기에 '박문사'라는 사찰이 들어선 것은 지난 1932년 10월 26일의 일이다. 춘무산의 춘무(春畝)는 이토 히로부미의 호이고, 박문사의 박문은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가리킨다. 이토 히로부미의 23번째 기일을 맞아 박문사를 세우면서 그 정문으로 쓰려고 흥화문을 떼어왔던 것이다.

박문사가 들어선 곳은 원래 장충단 영역이기도 하다. 장충단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즉 을미사변 당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죽은 조선 군인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제단이다. 그랬던 곳을 일제는 벚꽃을 심으면서 공원화해버렸고, 급기야 한쪽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까지 지어버렸다.

물론 해방 뒤 박문사의 운명은 온전하지 않았다. 본전이 있던 곳 주변에 일제의 기를 누른다며 '民族中興'(민족중흥)이라 새겨놓은 암반만이 그 역사를 어렴풋하게나마 증언해주고 있을 뿐이다. 흥화문도 지난 1988년 경희궁으로 옮기면서 그것을 본뜬 지금의 새 문을 세워놓은 상태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장충단을 비집고 들어선 박문사와 그것을 세운 의도는 사라졌을지언정 그 피해자들의 문제는 여전하다. 자그마치 1114회의 수요집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한 조선인과 그 후손들, 동토에 남겨진 '사할린 한인'과 '시베리아 억류 한인 포로', 해방 후에도 한참 동안 격리된 채 살아온 '한센인' 등 일제가 잉태하고 한국 정부가 방치해온 문제들은 여태 해결되지 않은 채 잊혀져 가고 있다.

/'다시, 서울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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