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 올려진 시골집은 흑백 사진 같은 풍경이다. 그것은 고향이면서도 더는 고향이 아니며, 우리의 집터였으면서도 더는 우리가 사는 집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은 오래 전 그곳을 떠나왔고 어느 새 그곳은 낯선 곳이 되어버렸다. '시골집'은 홀로 버려진 과거다.
그런데 그것은 다만 풍경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안에 담겨져 있던 체온을 언젠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느 길에 떨어뜨렸는지 도통 생각이 나질 않는다. 우리는 서로 뒤엉키면서 끈끈하게 나누는 정을 옆으로 밀어제친 지 꽤 되었으며, 서로의 삶을 보듬고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풍습도 고리짝에 놓고 자물쇠를 잠근 지 한참이 되었다.
신구와 손숙 주연의 연극 '아버지, 나 그리고 홍매'를 보는 내내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자국이 세월이 흐르면 다시 회한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해진다. 부모와 자식, 형제가 서로 주고받는 마음이 어느 날엔가는 추억이 되고, 그건 때로 가슴을 저미게도 하고 때로 우리의 영혼을 울컥하게 한다.
세월이란 그렇게 지나쳐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부르면 다시 돌아와 그날 그 시간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애타는 마음이야 어찌 하겠는가마는 우리의 가슴에 죽어 사라지는 것은 그래도 결국 없게 된다. 신구와 손숙은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 무대 위에 모신 사제가 된다. 연륜이 깊어진 연기는 역시 연기가 아니라 삶 자체가 되는 것을 또한 절감한다.
늙고 병든 아버지는 적막한 밤의 시간들을 보내며 외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몸은 굳어져가고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존재 자체가 점차 모두에게 부담이 되어가고,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에게 자명해져가고 있다. 늙은 아내 홍매는 언제 한번 제대로 정답게 대해준 적 없이 그렇게 떠나갈 채비를 차리는 남편이,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인생의 힘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린다. 아니던가? 우린 누구나 할 것 없이 언제나 그렇게 뒤늦게 깨닫는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마당 한 가운데 서 있던 매화나무에서 붉은 홍매가 피어난다. 아픈 세월이 닥쳐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꽃이 핀다. 우리에게 사랑과 생명을 주신 모든 부모님들이 이 봄에 피는 홍매로구나. 볕이 따스하다.
/성공회대 교수